UPDATED. 2024-03-29 21:25 (금)
진리의 장소를 살았던 젊음 그리고 타오르는 불꽃의 기억
진리의 장소를 살았던 젊음 그리고 타오르는 불꽃의 기억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11.12 17: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12> - 광주일고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철학자 이정우는 이렇게 썼다. “산보자에게 공간/장소는 그저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나타나는/드러나는 곳, 때로는 어떤 숨겨진 진실─존재하되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이 특정한 시선 아래에 드러나는 진리-사건─이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다. ……숨겨져 있던 것들이 드러나는 장소, 은폐에서 탈은폐로의 이행이 이뤄지는 장소, 존재의 숨겨졌던 얼굴이 드러나는 장소, 이런 장소를 우리는 진리의 장소라 부를 수 있다.” 그는 곧바로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 진리의 장소를 사는 것, 진리의 장소에서의 사건들을 사는 것은 산보자의 시선으로 그것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진리의 장소를 사는 것과 산보자로서 그 장소를 발견하는 것, 이 두 사건 사이에 장소의 진리가 존재한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인간사랑, 2012. 9) 그리고, 그의 말대로 이 장소는 ‘반복’되는 곳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역사의 장소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의 그 열두번째 공간/장소는 ‘광주일고’다. 광주일고가 호명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학교를 다녔던 순수한 학생들의 ‘독립운동’ 때문이다. 그들은 학생이었고, 자라서 어른이 됐고, 다시 무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역사라는 시간의 굴곡에 호명된 ‘광주일고’라는 표지판은 특정한 시간을 마주하는 장소로 소멸되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이정우의 말대로 ‘광주일고’라는 장소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즉물적 물질성에서가 아니라, 그 터 위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차이에서다. 그렇다면, 어떤 사건들이 있었던가. 두 가지를 기억할 수 있다. 1929년 11월 3일, 대일항쟁기의 한 가운데에 박준채와 박기옥이라는 사촌남매가 있었다. 10월 20일 오후 5시 광주발 목포행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다.

광주중에 다니고 있던 후쿠다 슈조 등 일본인 남학생들이 광주여고보생 박기옥과 몇몇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희롱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누이가 희롱당하는 것을 본 사촌동생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달려가 그를 후려쳤다. 같은 일본인 학생들이 맞받아 치면서 사태는 조선인-일본인 학생들 사이의 패싸움으로 번져나갔다. 경찰이 개입했지만, 박준채를 비롯한 조선 학생들만 체포됐다. 광주시내 조선인 학생들은 일경의 편파수사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11월 3일 일제히 항일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의 투쟁은 국내에 그치지 않고 해외로 까지 파급돼 갔다. 북간도를 비롯해 만주, 중국 관내와 일본, 미주지역 등 한인사회가 형성됐던 곳이라면 어느 한곳도 빠짐없이 국내의 광주학생운동에 깊은 관심을 내보였다.”(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광주학생운동의 국내외 확산과 그 성격」, 광주학생독립운동70주년기념 심포지엄, 1999.10.23.) 당시 사촌누이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희롱하던 일본인 남학생에게 맞섰다가 옥고를 치른 박준채는 흥미로운 삶의 여정을 걸어갔다.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그는 광주고보로 돌아갈 수 없었다.

퇴학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양정고보를 거쳐 1939년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1960년부터 2001년 87세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는 조선대 교수로 지냈다. 1929년의 사건 때문인지 그는 이후 줄곧 ‘교육운동’에 주력했다. 교직에 있는 동안 박정희 군사정부로부터 회유와 탄압을 번갈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으며, 1980년 조선대 교수들이 시국양심선언을 할 때에도 관여했다. 조선대 법학대학장, 대학원장 등을 지내기도 했고, 『한국화폐제도사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다.

문제적 인물 그리고 기념의 방식
사건의 한 복판에 있었던 인물은 ‘광주’를 떠나지 않고 그렇게 맴돌았다. 그는 ‘진리의 장소’를 살았으며, 동시에 그 진리의 장소를 맴도는 존재였다. 다시 여기에 또 하나의 기억을 접합해보자. 1999년 10월 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7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열렸다. 조동걸, 신주백, 지수걸, 박찬승, 장석흥 등 역사학자들이 참가한 학술대회였다.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를 조명해보는 자리였다. 주제 발표를 마친 뒤 종합토론 자리에서 당시 공주대 교수로 있었던 지수걸의 발언은 십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곱씹어볼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토론 중에 그는 이렇게 운을 뗐다. “오늘 저의 느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얼마 전 이 자리에서 3·1운동의 주제를 가지고 발표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똑같았습니다. 뭐가 같았는가 하면 앞좌석에 20대나 30대는 거의 없고 나이 드신 분들 몇 분만 모시고 발표를 했던 기억이 있고 오늘은 그때보다도 더 심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 문제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얘기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의의에 대해서 나이 드신 분들은 굉장히 의의가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시고 있는데 젊은이들 같은 경우는 관심이 그렇게 없습니다.” 자라나는 젊은 층이 이 반복되는 역사로부터, 자신의 역사에 새겨진 의미를 더듬어내지 못한다면, ‘기념사업’의 의미를 전환해서라도 젊은층의 참여를 확대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지적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만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지 교수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운동입니다.

적어도 학생들이나 교육을 담당하시는 분들이 함께 참여 할 수 있는 기념행사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상당히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역사학자로서 좀 더 광주학생운동의 의의를 오늘에 되살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미지 같은 것들을 발굴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저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계신 기념사업을 하시는 분들께서 이러한 점들을 유념하면서 기념사업을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광주일고 교내에 당시를 기념, 광주학생독립운동역사관과 불꽃을 형상화한 39m의 기념탑이 서 있다. 1954년 세워진 이 기념탑은 광주광역시문화재(기념물 제26호)로 지정돼 있다. 역사의 장소는 ‘역사관’ 또는 문화재라는 즉물적 물질성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어느 철학자가 지적했듯, 산보자의 시선으로 진리의 장소를 발견하는 것보다 진리의 장소를 살아내는 인식의 전환이 지금, 여전히 요청되고 있다. 광주일고에 새겨진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은 시간의 반복 속에서 더욱 더 정금처럼 단련되는 것이어야 하기에. 그렇다면, 이 공간/장소와 어떻게 마주칠지, 어떤 기억을 다음 세대로 가져갈지 더욱 고민해야 할 주체는 선명해졌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