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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年’의 풍경, 거기에 세월과 철학이 있다면
‘末年’의 풍경, 거기에 세월과 철학이 있다면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11.07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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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을 보내는 영화, 「조조-황제의 반란」과 「007 스카이폴」

 

▲ 황제 위에 군림하는 조조는 위풍당당하지만, 늙고 섬세하다. 007의 M은 자신의 퇴로를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영화는 소문도 없이 자취를 감춰갔고, 또 한 영화는 떠들썩하지만 이질적인 성격 때문에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 회자되고 있다. 「조조-황제의 반란」(이하 ‘조조’)과 「007 스카이폴」(이하 ‘스카이폴’)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을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를 들라면, ‘늙음’을 내세워도 좋을 듯하다. 늙은 재상 조조는 천하 분열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리고 그를 노리는 제국 내부의 자객들. 007의 여걸인 정보부의 국장 M도, 젊은 후배들이 치고 올라온다. 당신은 낡았으니 물러나라는 것. 이 가운데 역사의 인물 ‘조조’의 말년의 모습이, 또 하나는 가공물이지만 현실 속에서 모델을 픽업한 007 여성 수장의 늙음이 오롯하게 서 있다. 도대체, 왜 이들은 ‘늙음’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일까. 문득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말년의 양식’이란 흥미로운 시각이 떠오른다.

물론, 사이드가 말한 ‘말년성(lateness)’은 신중하게 가져와야 할 개념이 틀림없다. 2004년 9월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유작으로 남겼다. 사이드가 화해되지 않은 개인의 비판적 사고가 지닌 ‘저항의 힘’을 말년성이란 개념으로 담아냈을 때, 이것은 저 유명한 ‘시대와 불화하는’ 성찰적 지성의 힘,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늙은 예술가들을 읽어내는 새로운 비평적 잣대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이드가 말한 ‘말년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저 두 영화에 나타나는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그러며서도 대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노년’의 모습을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팔레스타인 출신의 비평가 사이드는 평안과 조화, 관용과 여유 대신 늙어서도 이스라엘 병사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격정의 삶을 살았다. “조화와 해결의 징표가 아니라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을 ‘말년성’의 양식적 특징으로 제시할 수 있었던 데는 그런 삶의 궤적이 작동한다. 사이드가 말한 ‘말년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저 두 영화에 나타나는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그러면서도 대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노년’의 모습을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조조,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떨림

이 영화 「조조」(감독 조림산)에서는 「적벽대전」 , 「명장 관우」 등의 영화들에서 梟雄의 모습으로 그려졌던 ‘조조’는 온데간데 없다. 그는 늙었고, 전투에 지쳤으며, 무엇보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신물이 나 있다.

여인을 가까이 하면서 평안을 얻고자 하지만, 꿈에서 목 잘린 관우가 그를 압박한다. 그는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워야 할 공간에서마저 늘 쫓기며, 불안하다. 그 깊숙한 곳으로 자객들의 칼이 겨눠져 온다. 올해 57세인 배우 주윤발의 호흡은, 어쩌면 애초부터 조조의 인간됨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데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戰火로 시달리는 자기 시대를 태평천하로 이끌어야 하는 과업을 등에 진 비장감 넘치는 宰相 조조의 모습을 연기해야 했지만, 그 자리에는 지치고 늙은 조조가 나타났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불일치가 「조조」를 ‘의외로’ 흥미롭게 만든다. 최측근까지 동원된 암살을 진압하느라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조조에게 ‘권력’을 넘겨달라고 애원하는 헌제와, 그런 그에게 삼분된 천하 지도를 펼쳐 보이며, “신은 이제 더 이상 지켜 줄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돌아앉는 조조의 마지막 씬은 수가 너무 얕은 장면이다. 그렇지만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 어두운 영화관에서 우리가 만났던 조조는 늙고, 병들고, 지친, 이제 그만 시대와 어떤 방식으로든 서둘러 화해했으면 하는 조조였다.

그런 조조가 이렇게 말한다. “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나를 죽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적 인물 조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해석학’이 이 영화에 도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아름다운 궁궐 동작대를 방공호처럼 만든 조조가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런 그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전율하고 있다. 죽음 앞에 선 인간. 죽음을 몰고 다녔던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 젊은 자객의 칼도 제대로 피하지 못하는, 자신의 보검을 휘두르다 숨이 가빠와 주저앉을 것만 같은 비루한 늙은 장수. 그러니 이제 조조는 영원한 늙음, 그리고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떨림으로 읽혀도 좋으리라.

지나간 세대의 위대함에 대한 헌사

1962년 ‘살인면허’를 쥐고 세상에 나온 007 제임스 본드. 올해로 영화 속 캐릭터가 만들어진 지 50년이 됐다. 23편의 영화가 만들어졌고, 주인공 역을 연기한 배우도 6명에 이른다. 지난달 26일 이 말 많은 영화 「스카이폴」(감독 샘 멘데스)이 국내 개봉됐다. 미국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기망을 잘 묘사해낸 「아메리칸 뷰티」로 주목 받았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작품이라 개봉 전부터 관객들의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 「스카이폴」은 앞서 개봉됐던 22편의 007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특유의 액션 장면도, 어김없이 신무기와 신차가 등장해 관객들의 넋을 빼는 장면도 앞선 영화와는 중량감이 너무 다르게 처리됐다. 명백한 적의 존재도 이 영화에서는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경계가 모호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표면적 주인공은 제임스 본드지만, 실제 영화의 흐름을 쥐고 있는 존재는 정보부의 수장인 M(주디 덴치)이다.

그녀는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훈육과 기율로 스파이 세계를 조율해왔다. 자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세대가 요구한다. 그대는 늙고, 낡았으니 물러나라는 것. 억울해하는 M은 자신의 방식,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다(주디 덴치는 「007 골든아이」부터 「007 스카이폴」까지 총 7편의 007 시리즈에 출연했다. 실제 그녀의 캐릭터는 영국 비밀정보국 MI6의 실존 여성 국장인 스텔라 리밍턴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설정이 별 볼일 없는 액션씬에도 불구하고 「스카이폴」을 흥미롭게 만들었다. 007 제임스 본드를 한물 간 스파이로 설정한 것. 007이 한물갔으니 그를 조련했던 M의 시대도 청산돼야 한다는 모종의 분위기. 혹은 그 逆의 논리. 일부에서는 샘 멘데스가 007을 리부트하기 위해 M을 제거해야 했다, 과거를 청산해야 했다라고 말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이러한 독법보다는 낡은 M의 시대를 기억하는 방식을 좀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청문회에 불려나간 M은 그의 남편이 사랑했던 시를 인용한다."옛날처럼 하늘과 땅을 뒤흔들 수는 없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우리로다. 모두 하나같이 영웅의 기개를 가진, 시간과 운명에 어쩔 수 없이 약해졌다해도, 강력한 의지로 싸우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겠도다." 틀림없이 이 것, 그리고 이 시를 암송해내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그윽한 곳이리라. 그녀는 새롭게 등장한 적이 자신의 손으로 길러낸 자기 세계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명민한 적을 상대할 인물로 한물 간 007을 기꺼이 호명한다. 명예롭지 못한 퇴임을 눈앞에 둔 M은 007의 고향 스코틀랜드 스카이폴까지 가서 거기서 적과 싸우다 결국은 죽고 만다. 스파이 수장답게 현장에서 죽는 것으로 자신의 퇴로를 선택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M 아니 주디 덴치는 흔들리지 않은 노익장을 과시했다.

1934년생이니까 그는 올해 77세다. 그의 노익장은 강인한 육체적 단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왔던, 살아냈던 시대의 어두움을 몸에 익힌 데서 오는 지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가 아니라, ‘노장도 죽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노장은 사라지지만, 다음 세대는 그에게서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를 M은 몸으로 질문했다. 이점에서 그녀의 ‘늙음’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세계와 불화하지 않는 기묘한 것이기도 하다(세계와 맞서지만 그의 세계는 루카치가 말했듯이, ‘낯설지만 곧 친숙해지는’ 동일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 그대로 ‘스카이 폴’, 즉 한 세대가 마침내 완전히 저물었다. 이제 질문이 남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세대는 어떤 세대였는가. 우리 세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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