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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당대비평’문부식 주간의 ‘반성적 성찰’ 둘러싼 당대의 지적 풍경
[풍향계] ‘당대비평’문부식 주간의 ‘반성적 성찰’ 둘러싼 당대의 지적 풍경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7.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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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30 16:02:24
지식인에게 성찰은 무엇인가. 지식인의 성찰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성찰과 반성이 갖는 ‘울림’이 개인적인 것이라고 알아왔다면, 성찰의 성질이 안으로 잦아드는 ‘내향성’에 있다고 믿어왔다면, 이제는 달리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누군가 “성찰과 자기반성에도 사회적인 책임이 따르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렇다”라는 대답이 따라야 할 듯 하다.

지금 신문과 온라인 매체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일련의 논쟁을 관심있게 들여다본 이라면 성찰에 대한 새삼스러운 개념 제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또 하나의 지식인 논쟁이 불붙고 있고, 그것은 지식인의 ‘성찰’을 둘러싼 논쟁이다. 거기에 폭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리까지 맞물렸다. 지식인의 자기성찰은 어디까지이며,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용납될 수 있는 선은 어디까지인가.

다시 문제는 조선일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2일 문부식 당대비평 편집위원의 신문 인터뷰에서 불거졌다. 이 인터뷰가 불러일으킨 파장은 첫째, 그 지면이 ‘조선일보’였다는 것, 그리고 인터뷰의 내용이, 조선일보의 표현대로 ‘뜻밖의 고백’이었다는 데 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문부식 씨는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조준희)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동의대 5·3 사건’ 관련자 처리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80년대를 규정짓는 하나의 사건인 ‘부산미국문화원방화사건’의 ‘주범’인 문씨는 조선일보에서 “동의대 사건 민주화 인정은 납득할 수 없다”, “민주화 운동이라도 면책특권은 없다”고 밝혔다.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은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경찰관 7명이 죽은 것과 관련하여 사법적 처벌을 받은 것”이라며 “심의위원회가 진상 규명을 하기에 앞서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것은 성급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

면 전체를 할애해서 조선일보는 그의 ‘반성’과 ‘성찰’의 목소리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동의대 사건에 대한 그의 ‘뜻밖의’ 성찰이 어디에서 비롯했는 지를 짐작케 해주는 부분은 ‘자기 안의 폭력’에 대한 것. 그는 “우리 안의 폭력을 제대로 성찰할 때만이 국가 폭력을 제대로 성찰할 수 있고, 그래야 사회적 논의 과정에서 국가 폭력의 부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말미를 짓는다.
인터뷰로는 모자랐던지, 조선일보는 ‘이례적으로’ 사설에서 그의 인터뷰를 다뤘다. “80년대 반미운동의 선구적 사건을 주도해 한때 운동권에서 ‘영웅’으로 간주됐던 문부식 씨는 사건 발생 후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를 묻고 또 물었다고 했다. 그 결과 ‘우리 안의 폭력부터 성찰해야 국가 폭력도 비판할 수 있다’는 성찰적 비판론에 도달했다. 문부식 씨의 참용기가 돋보이는 것은 바로 그 대목이다. 우리 사회에는 독선적 비판론이 큰 세를 이루고 있다. 자기만 옳다고 확신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선민의식과 메시아 의식이 그것이다. 문씨는 바로 이 독선적 비판론에 조용한, 그러나 분명한 ‘아니오’를 던진 것”이라며, 더할 수 없는 극찬을 보냈다.

많은 이들은, 문제의 발단이 무엇이든간에 결국 조선일보라는 ‘블랙홀’ 안으로 또 하나의 지식인이 빨려들어간 사건이라는 점을 공감했고, 논쟁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일 먼저 반론을 제기한 이는 문학평론가 김명인 씨로, “성찰 행위 그 자체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불행히도 그 성찰의 내용에도 또 그 형식에도 동의할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동의대 사건 ‘민주화 인정’ 못한다면 ‘내 안의 폭력’ 뒤늦게 눈뜬 자 착시”라는 글에서 문씨를 비판하고 나섰다. “80년대를 엄청난 폭력과 맞서 싸워 온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안에 들어있던 폭력과 심지어는 광기와 때로는 어설픔에 대해 다들 나름의 반성을 지불했거나 지불하고 있”으며, “만일 한국사회가 조금이라도 성숙했다면 그것은 민주화 ‘투쟁’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에 대한 성숙한 성찰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라고 말문을 연 뒤, 문 씨가 말하는 ‘우리 안의 폭력’에 대한 성찰이 ‘새삼스럽고 늦은 것’이라고 뱉는다. “특별히 많이 내장되어 있던 폭력과 광기에 새삼 눈이 뜨이면서 세상사람 모두가 선생과 같은 수준인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착시는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날카롭게 비꼰다.

아울러, 그가 보기에 폭력의 성찰을 논하는 자리가 다름 아닌 조선일보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폭력을 문제 삼는 인터뷰를 수 십 년간 파시즘적 폭력의 사주와 고무, 최소한 묵인에 앞장서온 조선일보의 기자와 마주앉아 진행하는 동안 불편하지 않았는지”라고 묻는 물음에 날이 선 까닭은 그 때문이다.

“틀에 박힌 성찰은 위험하다”

김명인 씨의 비판을 반론하고 나선 이는 출판평론가 변정수 씨이다. 그는 문씨와 출판사에서 한솥밥을 먹은 처지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먼저 전제한 뒤 문부식 씨를 지지하고 나섰다. 우선 김씨의 글이 ‘악의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마치 문부식 주간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지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반성’하면서 거기에 애꿎은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양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며, 문씨는 그동안 “부미방 사건 당시부터 희생자에게 줄곧 사죄를 해 왔으며, 아마도 앞으로도 평생 짐으로 지고 살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비판의 지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조선일보가 그의 발언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면, 설령 그것이 그의 경솔함에 기인한 것이라 해도 더 많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조선일보인가, 문부식인가. 문부식의 ‘성찰’은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 운동이 그 험한 세월을 견디며 일궈낸 성과라면, 그의 값진 ‘성찰’을 조선일보가 도둑질해다가 정치적으로 개칠하고 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결국, 더 큰 죄는 조선일보에 있다는 것이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철학)의 비판은 남다른 부분에서 출발한다. “문부식씨의 성찰에 동의하면서도 왜 화가 날까 생각해보니, 그의 논리라면 우리가 자칫 폭력주의자가 되겠구나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문씨의 성찰이 심층적이지 못해서, 의도가 그렇지 않았더라도 오해되고 왜곡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홍 교수의 지적이다. 홍 교수는 “자기 안에 틀어박힌 성찰은 위험하다. 남과 소통 없는 몰입은 사회적으로 의미 없다”고 전제한 뒤 문부식 씨의 성찰이 바로 그런 위험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이하게도 홍 교수는 성찰의 깊이 없음을 그가 ‘시인’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김지하, 박노해, 문부식, 우리에게 희망만큼 큰 절망을 안겨준 이들은 모두 시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시인들은 자기가 주관적으로 목격한 강렬한 이미지에 매몰되기 때문에 타자의 언어가 들어올 틈이 없다. 그러나, 사회적인 발언은 다의적 언어가 아니라 개념적 언어이다.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코드변형 하지 않고 바로 사회에 발언할 때, 사회와의 균열이 일어난다”는 것.

김보경 연세대 비교문학과 석사 역시 조금 다른 지점에서 논쟁의 윤기를 더하고 있는데, “홍윤기 씨는 문부식 씨가 자기성찰이라는 도덕적 우위성을 점유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문부식 씨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민주화운동의 옹호라는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적절한 거리두기의 비판이 오고가는 것이고, 우리 안의 폭력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다. 어쨌든, 논쟁의 빌미를 제공한 문부식씨의 책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이 이달 말 출간될 예정이다. 인터뷰 이후 입을 다물고 있는 문씨의 성찰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 지 비로소 확인될 듯 하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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