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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는 일본에 무엇을 가져갔을까
‘조선통신사’는 일본에 무엇을 가져갔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11.07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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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리뷰_ 『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 김경숙 지음┃이순┃332쪽┃18,000원

▲ 18세기 일본인들이 그린 조선통신사 사행 장면
조선통신사란 조선 후기 17~19세기 초까지 일본에 파견됐던 使臣이자 문화사절단을 말한다. 1607~1811년까지 모두 열두 번의 일본 사행이 있었다. 참여한 인원은 평균 470명 가량이었고, 기간은 1년 정도 걸렸다. 임진왜란 이후 등장한 문화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려져 있듯, 조선통신사의 일본 사행에는 두 가지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먼저 전쟁 직후 새로 정권을 잡은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계산이다. 즉, 새로 건립한 幕府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조선에 사행을 요청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행을 파견하기로 한 조선의 의도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같은 끔찍한 전란을 경험했던 조선은 이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일본의 동태를 살피고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회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자 그렇다면 400여명이 넘는 엄청난 외교사절단이 1년이란 긴 시간을 ‘외국’ 일본에 다녀온다고 했을 때, 이들의 여정에는 수많은 사건들, 에피소드가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이 일본에 가져간 것, 일본에서 보고 들은 내용, 이들의 행동 등 하나하나가 현미경을 들고 관찰해도 좋을 내용이다.

『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 은 일본 사행에 올랐던 조선 지식인들이 겪었을 일상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한 책이다. 조선통신사의 사행원 구성을 보면 신분과 직역이 다채롭다. 정사와 부사, 종사관 등 공식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 외에도 文士를 비롯한 음악, 미술, 잡기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다양한 직역의 인물들이 함께 참여한다.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군관, 일본인과의 詩文唱和 임무를 맡은 제술관과 서기, 통역을 맡은 역관, 공식의식이나 행차 등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화원, 글씨 쓰는 일을 맡은 寫字官, 의술을 담당하는 의원, 말을 타고 기예를 하는 馬上才,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 그 외 선원과 旗卒, 각종 잡무 담당, 요리사, 관료 그리고 개인적으로 데려가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타고 가는 배 안이 하나의 작은 조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들의 여정에는 조선 후기 신분제도의 그림자가 그대로 반영돼 있기도 했다. 잘 곳과 탈 것을 두고 벌어진 수행원들의 갈등과 다툼이 그렇다.

저자가 살펴본 사행록 곳곳에 역관과 문사들이 노골적으로 서로에 대한 적의를 드러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렇듯 긴 여정 자체가 하나의 신분 갈등, 계급 갈등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상의 반복이기도 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피납된 ‘被擄人’ 문제도 통신사행에서 자주 겪었던 것 같다. 1624년 사행의 부사 강홍중은 傳命을 하고 돌아오던 중 모리야마에서 피로인 세 명을 만났다. 그 중 한 명은 양반가의 여인으로 정유재란 당시 8살의 나이로 잡혀와 28년간 포로로 살았으며, 14살 된 딸이 있었다.

부사 강홍중은 이들을 설득해 부산으로 데리고 왔지만, 이후 대책은 아무 것도 없었다. 1625년,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신들이 인조를 만난 자리에서 강홍중은 “현재 일본에 있는 조선인 포로들이 만약 먼저 돌아온 포로들의 낭패한 사정을 듣는다면 다음부터는 쇄환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의 전공이 발휘된 곳은 아마도 이 책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문화교류’ 부분일 것이다. 사행의 목적이 초기에는 전쟁 재발 방지와 포로 쇄환이었지만, 이후 ‘도덕적 교화’와 ‘문화적 교양’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문화에 열망이 컸으며, 일본 백성들은 조선의 문물에 광적으로 흥분했다. 통신사 일행이 거쳐가는 곳을 중심으로 두 나라의 문화교류가 전개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조선통신사의 여정

한양 출발 -> 부산(사행선 이동) ->  대마도 쮡 아카마가세키(지금의 시모노세키) 등 각 지역 ->  오사카 ->  교토· 나고야(육로) -> 에도(지금의 도쿄) ->  전명식(국서 전달. 이후 여정 되짚어 귀국) * 부산에서 에도까지 뱃길 3천190리, 강물 120리, 육로 1천330리다.

 

이 가운데 서적 교류를 좀 더 들여다보자. 조선과 일본의 서적 교류는 서로 입장이 많이 달랐다. 조선은 서적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금했다. 조선의 기밀이나 정보 혹은 일본에 대한 생각이 일본에 전해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과의 서적 교류 혹은 매매는 대체로 밀무역 행태를 띠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조선의 일본 관련 서적이 활발하게 유입돼 간행 유통됐다. 양난 이후 일본인들은 조선이 침략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으로 조선에 촉각을 기울였다. 또한 조선의 성리학에도 큰 관심을 가져 이황의 『퇴계집』은 거의 집집마다 둘 정도였다고 한다. 문화적으로 당시 일본인은 조선을 통한 문화 수입을 간절히 원했고, 이는 조선통신사들이 우월감을 과시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조선 서적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은 1763년 사행록에 가서야 확인된다. 원중거 등에 의해 일본을 보는 조선 지식인들의 시각이 개방적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서적의 조선 유입은 주로 이들 통신사를 통해 이뤄졌다. 일본의 사상은 사행록과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문집에서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원중거를 위시해 조엄, 남옥, 이덕무 등이 대표적이고, 주자학파인 다루미즈 히로노부와 다케다 마사노부를 긍정하고 고학파인 이토 진사이와 오류 소라이의 서적과 사상을 주로 논쟁거리로 삼았는데, 그 내용도 깊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일본을 대하는 조선의 시각이 개방적으로 바뀔 때 일본은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통신사에 대한 대접이 허술해지고, 조선을 보는 자세가 변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존 연구가 조선통신사의 대외적 측면에 치중돼, 정작 사행원들의 생활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지적하면서 이들의 공식적 행사와 사적인 행사, 그리고 자잘한 일상 기록까지 면밀히 考究한다면 조선통신사의 일상뿐 아니라 당시 선조들의 일상생활 면모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 책이 서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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