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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질곡이 주름처럼 새겨진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시대의 질곡이 주름처럼 새겨진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 교수신문
  • 승인 2012.10.3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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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11> - 부산근대역사관

 

▲ 식민지 시대 동척 부산지점 전경. 오른쪽 작은 사진은 동척 부산지점 건물 앞에 진주한 미군들의 모습이다.

 

2001년 8월, 부산시 중구 주민 300여명이 옛 미문화원 건물 앞에서 거친 항의 시위를 전개했다. 건물 보존에 대한 지역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이 건물이 일제 강점기 때 최고의 권력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하 동척)이었던 것에 더욱 반발했다.

아시아로 내달리는 꿈, 동양척식주식회사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권력을 가진 기관은 동척이었다. 동척의 설립은 그 창립취지에도 밝혔듯이 ‘한국 사람들이 문명의 은택을 입도록 하는 막중한 책임을 띠고(중략) 한국의 자원개발, 식산진흥을 담당하기 위해 선량하고 근면한 자로 경험이 많은 일본인을 한국으로 이주시켜 선진 농법의 모범을 보인다’는 것으로, 지극히 한국, 한국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국책회사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 공포된 후, 이듬해 마산, 영산포, 사리원에 출장소가 들어섰다. 김해평야, 나주평야, 재령평야의 중심지에 출장소를 세운 것만 보아도 동척의 초기 주력 사업은 농업에 있었다. 평야에 위치했던 출장소는 1919~1920년에 지점으로 승격되면서 인근의 근대도시로 이전했다. 영산포출장소가 목포지점으로, 김제출장소가 이리지점으로 이전한 것처럼 마산출장소 역시 마산지점으로 승격하면서, 1921년 부산으로 이전했다. 동척이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금융업에 보다 더 주력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남아 있는 동척 건물을 보면 1층 천장이 높아 은행 업무를 하기 위한 구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부산 동척 건물은 미문화원 시절 개조가 이뤄져 3층의 구조를 갖고 있다. 동척의 지배 욕구는 조선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회사의 이름에 조선 혹은 한국이 아닌 ‘동양’을 내걸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동아시아의 패권 도전에 자신감이 붙은 일본은 동양을 여기저기에 ‘네이밍’ 했다. 실제로 동척은 국내에 머물지 않고 간도, 봉천, 장춘, 하얼빈, 대련, 천진, 북경, 청도까지 지점을 설치해 식민지 경제 수탈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중국 대륙으로 내닫는 동척의 실천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못다 이룬 꿈의 또 다른 재현이었다.

이 건물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건축양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대 건축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 건물에 겹겹이 쌓여있는
역사의 질곡 때문이다. 지금의 부산근대역사관은 동척을 중점적으로
부각하고 있지 않다. 수탈과 지배의 공간을 역사문화공간으로
재생하면서, 관광과 교육의 공간이 돼 가고 있다.


1930년대 부산 대청동의 거리
부산으로 이전할 당시 동척은 오늘날 부산시 중구 대창동에 있었으나 이후 새 사옥을 건립하고 대청동으로 이사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동척 부산지점의 사옥을 대청동에 신축할 계획이었지만 실제 완공은 1929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신문 지상에서는 건평 200평에 2층 최신식 건물로, 대청동 번화한 거리 내에서도 훌륭한 건축미를 가지고, 명소 중의 명소가 될 것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완공된 건물에는 당시 잘 사용하지 않던 ‘빌딩’이라는 명칭을 썼고, 이후 발행된 부산안내도에도 ‘동척 빌딩’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동척의 신사옥이 들어선 거리의 모습은 참으로 절묘했다. 동척 옆에는 조선은행 부산지점(지금도 한국은행 부산지점이다)이 이미 세워져 있었고, 거리의 끝에는 조선식산은행 부산지점이 있었다. 동척 건물이 있는 길 건너편에는 조선신탁주식회사 부산지점과 유사금융업을 하는 경남무진주식회사가 있었다. 무엇보다 동척 바로 앞에는 일본 헌병대가 자리하고, 전국을 쌀투기 열풍으로 몰아넣으면서 수많은 조선인을 알거지로 만든 미곡취인소도 있었다.

대청동 거리와 만나는 동광동 골목도 일본의 유명 은행들이 속속 들어서 있었다. 부산 최고의 금융거리는 일제강점기에 완성돼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1930년대 부산 대청동 금융가는 부산과 경남 일대의 자본과 부동산을 이곳으로 흡수해버릴 것만 같은 위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 권력에 반항이라도 하는 날엔 헌병대로 직행할 것 같은 위협의 공간, 절대 권력의 공간이었다.

광복 후의 동척 건물
광복 직후 미소 양군의 한국 분할 점령이 발표되고, 9월 중순에 미군의 선발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동척 부산지점은 부산에 진주한 미군의 숙소, 미공보관, 미문화원으로 사용되면서 여전히 부산사람들과는 괴리된, 타자를 위한 건물이었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물의 주인이 교체된, 외세에 여전히 눌려서 잃어버린, 토폴로지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1982년 전국을 떠들썩거리게 한 미문화원 방화사건까지 일어났다. 방화를 감행한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신학대 학생들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미국만을 믿었던 학생들은 오히려 1980년 신군부의 광주시민 학살을 묵인한 미국을 발견했다. 학생들은 왜곡된 한미관계를 바로 알리고자, 그 해소 공간으로 미문화원을 지목했던 것이다. 사건 이후 건물 경계는 더욱 강화되고, 건물 주위로 늘 한국경찰들이 배치돼 있었다. 때문에 지역 주민들에게는 차단된 공간이자, 죄짓지 않고도 죄를 지은 듯한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건물에 남겨진 역사 때문에 동척 부지에 대한 점유권이 완전히 부산시로 넘어왔을 때도 제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열린 공청회장은 고성이 오가고, 의자가 날아갈 뻔한 살벌한 분위기로 가득 찼었다. 동척 건물을 잔존시켜 역사교육의 자료로 남기자는 주장과 조선총독부 건물도 허물어진 마당에 대표적 수탈기관이었던 동척 건물을 굳이 남겨야 하는가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그래서 동척 건물을 그대로 두는 주장에 대해 주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동척 주변에서 나고 자란 주민들에게 동척 건물은 교육의 공간이라기보다 그저 지긋지긋한 트라우마의 공간일 뿐이었다.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가는 길
부산근대역사관 건물은 2001년 부산시 기념물 제49호로 등록됐다. 현재의 건물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하 동척)이 확장되면서 1929년도에 세워진 것이다. 이 건물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건축양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대 건축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 건물에 겹겹이 쌓여있는 역사의 질곡 때문이다. 지금의 부산근대역사관은 동척을 중점적으로 부각하고 있지 않다. 수탈과 지배의 공간을 역사문화공간으로 재생하면서, 관광과 교육의 공간이 돼 가고 있다. 기억과 삶을 공유하면서 장소의 두려움이 치유되고, 공생의 공간으로 완성되기를 바랄 뿐이다.

 

양흥숙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전임연구원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한 필자는 부산지역사, 지역성 연구에 관심을 쏟고 있으며, 「조선후기 동래 지역과 지역민의 동향」, 「개항 후 초량 사람들과 근대 공간의 형성」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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