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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상반기 학계 결산] 다양성과 치밀성 사이
[2002년 상반기 학계 결산] 다양성과 치밀성 사이
  • 권진욱 기자
  • 승인 2002.07.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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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30 15:57:08
2002년 상반기에도 크고 작은 학술대회가 계속해서 열렸고 잡지들도 개성 있는 기획을 쏟아냈다. 그동안의 학술대회와 학술 잡지를 통해서 우리 학계의 전반적인 흐름을 짚어보도록 한다.

상반기에 가장 눈에 띠는 학계 동향은 매년 7월을 전후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열리는 대규모 학술대회를 통해서 ‘거대한 인력풀’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한국학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지금의 한국학은 가히 ‘골드러시’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주최한 ‘세계한국학대회’(7월 18일~20일)와 서울대에서 열린 ‘환태평양 한국학대회’(6월 18일~20일)는 국내뿐만이 아니라 미주와 유럽, 일본, 중국, 인도, 구소련,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세계각지의 한국학 연구자들을 총망라해 지금까지의 연구 현황과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규모 학술대회였다. 특히 정문연에서 처음으로 연 ‘세계한국학대회’는 이념에 따라 국학, 조선학, 고려학, 코리아학 등으로, 학문분야별로 역사, 문학, 종교, 예술, 언어, 정치, 경제, 교육 등으로, 그리고 범주별로 남한과 북한으로 사분오열된 한국학의 여러 가지 경향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개방적인 자리였다.

마찬가지로 과학기술분야에서는 2백30명의 해외한인학자를 비롯, 3백30여명의 학자들이 참석한 ‘해외 과학기술자 대회’(7월 8일~13일)가, 사회과학계열에서는 18개국 1천여명의 언론학자들이 참여한 국제언론학대회(7월 15일~19일)가 규모 있는 ‘학술시장’ 역할을 했다.

인문사회과학분야

한편 국사학계와 경제사학계에서는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과 경제성장론의 지속적인 논쟁구도가 이어졌다.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양 진영의 인식차는, 상호 대화를 시도한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의 ‘식민지근대화론의 재검토: 학제적 심포지엄’(2월 16일), 안병직 교수와 미국의 한국사 연구경향을 다룬 역사비평 여름호, 교수신문 지면 등을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어졌고 신문화사, 일상사, 미시사, 풍속사 등으로 지칭되는 새로운 학문조류를 반영한 책들이 대거 출판되기도 했다.

사회과학계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제를 둘러싼 비판이나 거대언론의 횡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크게 일기도 했다. TV토론회나 정치인 초청 대담에서 불거져나오던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개헌론, 의회 강화론 등을 검토하는 논문이 정치학, 행정학, 법학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나왔다. 현정부의 한반도정책인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가 비슷한 비율로 엇갈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국내외 관련 학자, 정책 담당자들이 대거참석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의 ‘정상회담 이후의 한반도’ 학술대회에서는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목소리가 주종을 이루기도 했다. 또한 일부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에 대한 비판도 많았는데 ‘신문과 방송’ 6월호에서는 일부언론에 의한 대선후보 검증을, ‘탈냉전시대 한국의 시민사회와 지식인’(6월 11일) 토론회에서는 거대언론의 지식인 길들이기, 시민운동 물흐리기 현상을 꼬집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기도 했다.

한편 상반기 한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월드컵’을 전후해서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을 논의하는 학술대회도 여럿 열렸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주최한 ‘2002년 월드컵과 한국사회의 재도약’(5월 20일)과 문화개혁시민연대 등이 주최한 ‘월드컵은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겼나’(7월 9일)가 대표적인 예. 전자가 중장기적 안목에서 국가발전 방향을 사전 검토했다면 후자는 ‘우발적인’ 성공을 계속적으로 이어가도록 그간의 성과를 사후 정리하는 자리였다.

동아시아 담론의 ‘제자리 찾기’도 관심이 있는 연구자들이라면 누구나 포착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도구적 이성이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과 같은 서구 담론의 超克을 우리 학문의 중요한 과제로 설정한 이들에게 동아시아 담론은 중요한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해왔다. 과거 유교민주주의론, 유교자본주의론 등과 같이 다분히 정치적인 논쟁에서 가열됐던 동아시아 담론이 동아시아의 신화나 법제를 다루는가 하면 고대중국의 서사문학을 서구 소설과 대비시킴으로써 독자적인 전통을 찾는 등 보다 다각화된 연구로 진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조동일 서울대 교수는 지난 6월 ‘세계문학사의 전개’를 발간함으로써 세계문학사 연작을 일단 완결해 우리 학계에 중요한 틀거리를 던져주기도 했다.

한편 인문사회과학 잡지들은 연초에는 ‘9.11테러’ 이후에 대해서 다룬 곳이 많았다. ‘창작과 비평’, ‘당대비평’, ‘비평’, ‘실천문학’ 등은 봄호를 통해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그러나 ‘기억과 역사의 투쟁’이라는 주제로 국가주의, 국민사 등을 비판한 당대비평 특집호, 사회갈등의 해결방안에 대해서 다룬 ‘사회비평’ 여름호, 녹색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다룬 ‘환경과 생명’ 여름호 등은 나름대로의 기획력이 엿보인 기획이었다.

과학기술분야

올해 상반기 과학기술분야의 가장 큰 쟁점은 생명윤리에 대한 논쟁이었다.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해 장차 인간복제로 이어질 우려가 있는 배아복제에 대한 법제화를 둘러싸고 생명과학계, 종교계, 시민단체, 윤리학계, 법·행정학계 등이 가담, 초미의 사회적 관심사가 됐다. 생명윤리기본법안의 제정이 가시권에 들고 생명복제 연구가 더욱 가속화될 하반기에는 논쟁이 더욱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학계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비판받고 있는 SCI에 관한 논쟁도 교수신문과 일부 언론을 통해 전개됐다. 상업적 용도가 다분한 ISI사가 펴내는 일개 저명학술지 목록에 불과한 SCI(과학분야), AHCI(인문예술분야). SSCI(사회과학분야)를 어떻게 교수업적평가에 반영할 수 있느냐는 것. 그러나 연구의욕과 역량이 떨어지는 일부의 볼멘소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지금 학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SCI에 의한 업적 평가를 전면 폐지하는 것보다는 보완 내지는 선별적인 수용에 무게중심이 가 있다.

한편 몇 년 전부터 나오기 시작한 ‘이공계열 기피현상’이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과학재단 25주년 국제심포지엄(5월 16일)에서는 기초과학 육성방안에 대한 정책적 논의가 이뤄졌으며,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는 기초과학육성, 원활한 인적자원 수급이라는 각기 다른 목적에서 사기진작책을 잇따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사기진작책들은 지원금 확대, 병역제도 개선, 대학입시 유인방안 등의 단기적 처방들을 골자로 하고 있어 사회적 토대와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이공계열 기피현상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는 달리 기초과학계를 중심으로 과학대중화를 위한 여러 가지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대한물리학회는 올 한해 내내 과학대중화행사를 수시로 벌이고 있다. 한편 일반인을 대상으로 쉽고 흥미롭게 씌어진 과학대중서도 꾸준히 발간되고 있으며, 기초과학자들의 신문기고나 TV프로그램 출연 등의 빈도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진보적 학계

진보학계는 실천적 돌파구를 찾기 보다는 기존의 흐름을 다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학자들로 구성, ‘열린 연대’를 지향하는 반년간지 ‘시민과 세계’의 창간(3월), 다양한 스펙트럼의 진보학계가 시민사회단체와 만났던 ‘연대와 성찰 : 사회포럼 2002’(3월 22일~24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할 진보진영의 대안정책 생산을 기치로 내걸었던 ‘대안정책포럼’(4월 13일, 7월 13일), ‘사회민주주의는 한국 사회진보의 대안인가’ 비판사회학대회(5월 25일)가 이런 흐름을 그대로 보여줬다.

지난 1999년부터 지속된 새만금 간척사업, 3월의 발전노조 파업, 조선일보 반대투쟁 등이 진보학계에 주요한 이슈가 됐다. 진보학계를 대표하는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정치학)는 “학진의 평가가 엄격해진 이후 학단협 소속단체에 미친 영향도 크다. 학단협의 고민은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학문적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인데 제도화되는 만큼 문제의식이 약화될 우려가 큰 것이 사실이다”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여성학계는 ‘진보 이론의 화수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전남대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위한 국제학술대회(5월 15일~17일)는 제주 4·3항쟁, 5·18민주항쟁 등 한국의 사례뿐만 아니라 일본, 멕시코, 독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세계 각지의 민주화 이행과정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정리해보는 자리였다. 이 밖에도 이화여대에서 열린 ‘한국역사 속의 여성과학자들’(5월 24일), 숙명여대에서 열린 ‘여성의 권리, 사이버 권리’는 호주제 폐지, 군가산점 폐지 등의 사회적 이슈 못지 않게 다양한 주제로 관심을 넓혀가고 있는 여성학계의 행보를 알 수 있게 했다. 전자는 남성친화적인 통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과학기술에 대한 여성의 역할을 실증적으로 부각시키고 후자는 최근 사회적 경각심을 끌고 있는 사이버 성폭력에 대한 대처방안을 내실 있게 다뤄 박수갈채를 받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점차 교수 업적평가 기준이 엄격해지고 학회와 대학간의 실적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정량화된 연구실적도 점차 늘어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신한 논의도 일부 있었지만 학문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精緻한 학술의식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은 상반기 학계 흐름을 짚어보는 자리라면 아쉬움으로 남는다.

권진욱 기자 atom@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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