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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 연구, 현실 쟁점과 분리돼 사회적 질병 치료에 도움줘야”
“기호학 연구, 현실 쟁점과 분리돼 사회적 질병 치료에 도움줘야”
  • 교수신문
  • 승인 2012.10.3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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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참관기_ 제11차 세계기호학대회를 다녀와서

▲ 지난 10월 5일부터 9일까지아시아 최초로 중국 난징사범대에서 제 11차 세계기호학대회가 열렸다.

제 11차 세계기호학대회가 중국 난징사범대에서 지난 10월 5일부터 9일까지 중국을 비롯해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온 약 800여명의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1969년 파리에서 레비-스트로스, 야콥슨, 에코 등이 주축이 돼 창립한 세계기호학회는 제 1회 밀라노 대회를 시작으로 매 5년마다 대회를 개최해오다 최근에는 5년에 2회로 횟수를 늘렸다. 이번 대회는 최근 놀라운 속도로 기호학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중국기호학계가 아시아권에서는 최초로 세계 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대회는 ‘글로벌 기호학: 상이한 문명의 가교 놓기’라는 전체 제목을 설정해 50개의 세부 세션에서 약 450편의 논문이 발표됐으며 15개의 기조발제가 이뤄졌다.

먼저 대회 첫날 첫 번째 기조 발제자로 나선 독일의 철학자 발덴휄즈 교수는 기호학과 현상학의 역사적 계보를 추적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사물 자체를 추구하는 현상학과 기호의 매개적 역할을 강조하는 기호학은 인식론적 토대의 기본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상호 보완적 관계에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는 요지의 발제였다. 이를테면 기호학은 현상학으로부터 ‘시스템’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적 특이성과 타자성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터득할 수 있으며, 현상학은 기호, 단어, 그림 등의 매개체를 통해 새로운 기호학적 안목으로 사물 자체에 대한 연구를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신체기호학과 ‘로시 란디’의 발견
발덴휄즈 교수는 ‘현상은 곧 기호에 달려 있으며 기호는 다름 아닌 경험’이라는 명제를 내걸면서, 야콥슨, 바르트 등 현대 기호학이 현상학으로부터 받은 지적 세례의 계보를 파고들었다. 특히 그가 방점을 찍은 문제는 화자의 신체성 문제였다. 같은 맥락에서 프랑스 기호학계를 대표하는 퐁타니 교수의 발표가 이어졌다. 퐁타니 교수는 ‘신체는 곧 기호학적 행동자(actant)가 형태를 취하는 실질’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아울러 메를로 퐁티가 발전시킨 현상학적 신체 개념화에서 인간의 몸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운반체로 파악됐다는 점을 환기했다.

특히 최근에 앙지외(Anzieu)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이 ‘스스로의 몸(proper body)’에 대한 개념화로 제시한 ‘피부-자아’는 현상학에서 규정한 신체의 속성들과 접맥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이 같은 신체 기호학의 인식론적 토대 규명을 통해 퐁타니는 신체의 흔적과 신체적 기억의 상이한 양태성들을 규명하고 신체적 흔적의 생산 방식과 해석 방식을 신체 기호학의 중요한 의제로 설정했다. 신체 기호학의 인식론적 토대 설정이라는 연장선상에서 베네수엘라에서 온 피놀 교수가 제시한 신체계(corposphere) 개념은 로트만의 ‘기호계(semiosphere)’ 개념에서 착상된 것으로서, 다면적이면서 역동적인 기호학적 복잡계로서의 신체와 관련된 일체의 기호현상계와 이에 대한 종합적 연구 장을 지칭하고 있다.

기조 발제 가운데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발표는 이탈리아 언어철학자로서 마르크스와 바흐친 사상의 권위자인 폰지오 교수의 「칼 마르크스의 기호학」이었다. 기호 연구가 역사적 변증법적 유물론과 견주어 결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환기할 때 비로소 마르크스주의와 기호학의 관계가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폰지오 교수는 기호 연구가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에 근본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흔히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별을 방어벽으로 삼아 기호학을 과학의 반열에 올려놓는 반면 마르크스주의를 이데올로기의 위상으로 격하하려는 기존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과학적 연구의 순수성에 매달리고, 과학을 오염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요소를 과학과 분리하려는 입장들은 모두 기호와 이데올로기가 분리될 수 있다는 그릇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 발표였다.


폰지오 교수에 따르면 기호와 이데올로기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심지어 기호학 연구의 방법, 대상, 범주를 규정할 만큼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과 소쉬르의 가치 이론을 비교해 상품과 노동으로서의 언어 연구를 착발시킨 이탈리아의 마르크스 기호학자 로시 란디의 중요성을 환기하면서, 마르크스 기호학의 계보를 재구성하는 본격적 작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기호학 사전의 편집자로 온라인상에서 양질의 다양한 기호학 관련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캐나다의 원로 기호학자 폴 뷔샥 교수는 기존의 기호학 연구가 여전히 지극히 높은 추상화로 남아있으면서 현실적 삶의 긴박한 쟁점들과 절연돼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사회적 질병 치료 해결에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학문으로 거듭날 것을 요청했다.

세부 세션에서 많은 청중들의 관심을 끈 분과는 예년 대회와 마찬가지로 인지 기호학 분야였다. 이번 세션에서는 프랑스 언어학자 퀼리올리의 인지적 모델을 문제 해결의 미시적 인지과정 설명에 적용한 논문을 비롯해 시적 표현, 은유, 추론, 서사적 정체성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인지언어학, 퍼스 기호학, 신경 과학 등의 다양한 방법론을 융합한 논문들이 발표됐다. 북유럽과 동유럽 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세션에서는 여전히 생명기호학과 로트만의 문화 기호학에 대한 주제가 중심 화두였으며 그 가운데 로트만과 우엑스퀼의 기호사상을 비교한 타르투 기호학파 세션도 주목을 끌었다. 또한 마케팅 기호학과 소비자 문화 기호학 분과에서는 마케팅 컨설턴트들이 참여해 실제 사례들을 통한 기호학의 응용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주었다. 이번 대회는 어느 대회보다도 한국 연구자들이 많이 참여한 대회였다. 송기정 한국기호학회 회장, 최용호 교수와 김수환 교수, 퍼스 연구의 권위자 이윤희 박사 등 약 20여 명이 발표자로 참가했다.

특히 ‘기호의 카타스트로프, 카타스트로프의 기호’ 세션과 ‘근대 동아시아의 신체 언어 표상’ 등 독자적으로 운영한 세션도 한국 기호학의 역량을 주체적으로 발신했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박일우 교수, 고려대 연구팀 등의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 백승국 인하대 교수팀의 유통 매장의 장소 브랜딩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 강미정 서울대 연구교수의 SNS 디자인 분석 등 다양한 발표가 이뤄졌다. 특히 홍지순 서강대 교수가 발표한 동아시아 신여성의 시각적 표상의 비교 분석은 탄탄한 논지와 실증적 자료를 제공하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애니메이션 전공자인 김민형 제주대 강사는 동아시아 애니메이션에 나타나는 증강 신체의 양상을 영어 모국어 화자조차 경탄할 정도로 유창하게 영어로 발표해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한국 기호학자들의 약진
필자는 「우주, 신체, 문자: 문자의 기호 인류학 시론」이라는 기조 발제를 통해 진화론과 표음중심주의로 무장한 협소한 의미의 문자개념에서 벗어나 ‘그래픽의 다원성’으로 문자 개념을 확대할 것을 주장했다. 이 같은 개념적 확장의 인식론적 근거로 프랑스 인류학자 막셀 쥬스의 모방소(mimogram) 개념, 르루와-구랑의 선사미술학적 이론, 데리다의 ‘에크리튀르’ 개념을 엄밀하게 논증한 데 이어, 언어학, 미술사, 디지털 이론 등을 종합적으로 짚어낸 다음 선사 이미지에서 시작해 인간 신체의 가시화 프로젝트의 이미지 등, 다양한 사례들의 분석을 통해 ‘그래피즘(graphism)’의 기호 인류학적 토대를 제시해 외국연구자들의 반향을 일으켰다.


김성도 고려대·언어학과
필자는 파리5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세계기호학회 집행위원이며, 내년 1월부터 한국기호학회 회장을 맡는다. 저역서로『그라마톨로지』(역서), 『기호, 텍스트, 그리고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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