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3:05 (목)
원로칼럼_ 사과도 될 수 있고 배도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원로칼럼_ 사과도 될 수 있고 배도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 이병화 前신라대 총장·국제관계학
  • 승인 2012.10.29 16: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병화 前신라대 총장·국제관계학
중국 조선족자치주 마을 연길에 사과배가 자라고 있더군요. 금년에는 추석과 국경일이 겹쳐서 중국은 온 나라가 푸짐한 연휴를 즐겼지요. 그런데 불과 며칠 지나자 제가 다니는 베이징 제2외국어대에서는 각국 학생들이 자기 나라를 자랑하는 ‘국제문화축제’에 이어 학교가 주최하는 운동회로 다시 황금연휴가 시작되더군요.

저는 벼르고 있었던 여행길에 올랐지요. 1시간 40분을 날아서 옌지(延吉, Yanzi, 일제 강점기의 간도)을 찾아갔지요. 이곳은 중국 인구 200만 명의 지린성(인구 200만 명, 면적은 남한의 절반)의 동부 지방으로 약 60%(현재는 40%로 추정)인 조선족의 자치주정부 청사가 있으며 동으로는 러시아와 남으로는 두만강에 접하고 있지요. 자치주답게 모든 상점 간판들이 한자 밑에 반드시 한글을 병기하도록 조례가 마련돼 있답니다. 남북한 사람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해 통일된 미래사회를 보는 듯합니다. 외국어를 모르고도 불편함을 모르는 유일한 곳이라고 할까요.  

이곳에는 우리 선조들의 수난의 흔적이 많고, 특히 항일투쟁을 했던 독립투사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문익환과 윤동주의 모교가 있고, 선구자 가사에 나오는 일송정과 모란강이 흐르며, 두만강과 백두산(장백산)이 멀지 않지요. 이곳 조선족들은 한국 사람들이 미우면서도 가까워지고 싶은 아주 복잡한 대상이랍니다. 오랜 세월 헤어져 있던 가족이 만나서 겪게 되는 문화 갈등이라고 할까요.

이번 저의 여행 목적지는 옌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수원입니다. 이곳 과수원에서 재배하고 있는 사과와 배를 접목해 만든 ‘사과배’를 좀 자세히 보고 먹어보려는 생각에서지요. 작년 여름 우리 동포 선각자들이 세운 옌볜과학기술대에서 주최한 국제심포지엄에서 제가 ‘중국 조선족의 디아스포라와 미래’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때 참석하신 교수님 한분이 여기서 ‘사과배’를 봤느냐면서 ‘우리는 사과도 아니고 배도 아닌’ 정체성이 모호한 소수민족으로서 점차 인구가 감소하고 민족의식이 소멸하고 있는데, 당신의 논문은 너무나 낙관적인 측면에서만 서술했다고 추궁하시더군요. 길들여진 임기응변으로 “사과도 아니고 배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과도 될 수 있고, 배도 될 수 있는 긍정적 사고를 갖고 젊은이들을 교육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지요. 그러면서도 사과배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와서 조선족의 문제를 이야기했다는 자책감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오면 반드시 사과배 밭을 가보리라 마음먹었거든요. 

저는 45년 간 기업과 대학에서 일하고 은퇴하면서 비로소 철이 좀 들기 시작했던지, 살아온 뒤를 돌아봤더니 참으로 약게만 살았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더군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들의 희생을 딛고 잘 살았건만 그 빚을 갚을 길을 찾지 못했어요. 더욱이 그동안 강의실에서 국제관계를 강의하면서 너무나도 편향된 관점에서 안이하게 가르쳤다는 후회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은퇴한 다음날부터 종로 중국어학원에 나가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이미 70이 훨씬 넘어선 나이지만, 성격이 먼저 덤벼드는 습성이어서 무작정 시작했어요. 일 년을 했는데도 시원치가 않았어요. 저의 아내가 보다 못해서 그렇게 꼭 중국어를 해야 한다면 차라리 중국에 가서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중심’ 초청학자 자격으로 건너와서 일 년을 보내고, 그래도 논문 쓴다는 핑계로 중국어 공부는 뒷전으로 밀린 것을 핑계로 삼아 다시 베이징 제2외국어대 漢語科 1학년 학생으로 입학해 현재 학생기숙사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이 때문에 곡절을 겪으면서 이곳 말로 꽌시(關係)를 통해 특례입학을 한 것이지요. 

앞으로 연길에 가서 선각자들이 몸을 던져서 봉사하시는 현장에 합류하고 싶습니다. 저같이 낡은 그릇도 그 곳에서는 쓰여질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봉사하는 기쁨을 느끼면서 속죄하는 심정으로 살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사과 배’를 키우면서, 그들이 미래사회 글로벌 네트워크의 선봉에 서서 민족통일과 한중관계 발전의 가교가 되고, 아시아공동체 형성의 주역으로, 나아가 세계 인류평화의 중심에 서는 날을 꿈꾸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연길 ‘사과배’ 밭을 찾아 갑니다.


이병화 前신라대 총장·국제관계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