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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비밀 학파, 어떻게 세계 수학계를 평정했나?
프랑스의 비밀 학파, 어떻게 세계 수학계를 평정했나?
  • 양재현 인하대·수학통계학부
  • 승인 2012.10.24 1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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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야기 ⑧ 부르바키의 베일을 벗기다

1950~60년대에 세계 수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세계 수학을 선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예전보다는 많이 약화되었지만 아직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조그만 비밀스런 학파가 있다. 부르바키(Bourbaki) 학파이다.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 학파는 10여년 전부터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최근에 와서는 이 학파가 세계 수학계에 끼친 영향에 대한 평가가 찬반으로 엇갈리고 있다. 

1934년경에 프랑스의 수학자 앙드레 베이유(1906~1998)와 앙리 카르탕(1904~2008)이 프랑스의 각지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는 에콜 노르말 쉬페르외르(ENS)의 졸업생인 동료 수학자들에게 한 달에 두 번씩 파리의 조용하고 아늑한 카페에 모여 수학의 교수법에 관해 토의하자는 제안을 했다.

모임의 초창기 멤버는 베이유, 카르탕, 쟝 듀돈네(1906~1992), 클로드 슈발레이(1909~1984), 쟝 델사르테(1903?1968), 찰스 레스망(1905~1979), 소렘 만델 브로이트(1899~1983)들이다. 게다가 이들은 여름 방학을 틈타 2주간 이 모임의 회원의 별장이나 시골의 대학에서 세미나를 가졌다. 이 모임을 부르바키라고 명칭을 했으며, 베이유의 부인 에베린은‘니콜라스’라는 세례명을 지어 줬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대학교의 수학교재가 없었다. 이들은 진지한 토론과 격론을 통해 얻어진 참신한 내용을 담은 책을 니콜라스 부르바키라는 필명으로 발간했다. 이 책은 모든 회원의 만장일치의 의견을 얻어야만 발간될 수 있다는 것과 50세가 되면 이 모임에서 은퇴하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참신한 책의 발간으로 인해 부르바키라는 이름이 프랑스전역에 알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이름에 궁금해했다.
일설에 의하면 부르바키라는 인물은 그리스계의 프랑스 장군으로 Poldavian 왕립학회(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이 모임의 일부는 Nancy대로, 베이유는 시카고대으로 옮기게 됐다. 그래서 한때는 낭카고(Nancago) 수학회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여전히 이 모임은 ENS의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10명 이내의 작은 모임으로 지속되고 있다. 가끔 이 모임에는 외부인을 참관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 모임에 있었던 한 참관인은 이들의 토론이 얼마나 격렬하였던지 마치 미친 사람들의 집단 같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만장일치, 50세 은퇴’가 불문율

지난 2006년에 출판된 부르바키에 관한 두 권의 저서와 1966년에 필즈상을 수상한 알렉산더 그로텐딕(1928?)에 관한 2008년의 기사에 의해 부르바키의 비밀스런 내부의 실태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1930년대에 델사르테와 만델브로이트가 의견차이로 탈퇴했고, 1950년에 부르바키의 멤버였던 그로텐딕이 1960년에 심각한 운영의 의견 충돌로 인해 탈퇴했다.

ENS의 졸업생이 아닌 그로텐딕은 1960년대는 독자적으로 프랑스의 젊은 수학 인재들을 끌어들여 그의 학파를 결성해 그의 전성기를 누렸다. 반면에 부르바키는 점차로 그의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 피에르 데리네가 베이유 가설의 중요한 부분을 증명함으로써 부르바키의 영향력을 과시하였지만. 현재 지난 20세기 후반에 부르바키가 세계 수학계에 끼친 영향에 관한 역사적인 평가가 진행되고 있는중이다.

어떤 이유로 1950년대에 부르바키가 세계 수학계에서 주도권을 잡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1920~30년대의 프랑스 수학은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1933년 이전의 20세기 초반의 세계 수학을 독일의 괴팅겐, 베를린 학파가 선도적인 역할을 하며 이끌어 왔다. 그런데 1933년에 나치 정권의 유태인 탄압으로 인해 독일의 수학계가 붕괴됐다. 헤르만 바일, 칼 지겔, 쿠르트 괴델, 존 폰 노이만, 에미 뇌터, 리처드 쿠
란트 등의 저명한 수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래서 1935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는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세계 수학계를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초반에 들어서서는 바일이 고등연구소에서 은퇴하고, 지겔은 고등연구소에 사표를 내고 다시 괴팅겐 대학으로 돌아가고, 폰 노이만은 게임이론과 컴퓨터 공학에 관심을 가지며 미국 정부의 여러 행정적인 일에 몰두하는 바람에 세계 수학계에 특히 순수수학 분야에 공백기가 생겼다. 지겔이 괴팅겐으로 돌아가 예전의 괴팅겐 전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전쟁 중에도 부르바키는 계속 활동을 했다. 6권의 책을 출간했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40대인 초기의 창립 멤버들은 수학의 전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아왔으며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왕성한 연구 활동을하고 있었다. 부르바키의 멤버들인 로랑 슈바르츠, 짱피에르 세르, 레네 톰이 각각 1950년, 1954년, 1958년에 필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시카고대의 베이유와 프랑스의 낭시대의 카르탕이 앞장서서 부르바키를 이끌어가며 세계 수학계의 빈자리를 차지했다.

1960년대 빈 수학계 장악한 부르바키

10여 년 전부터 부르바키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르바키가 출판한 가환대수에 관한 저서와 리군과 리대수에 관한 저서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대수학 분야에서는 너무 추상적으로 접근한 점, 응용수학을 무시한 점, 확률론을 취급한 데에 많은 결함을 보인 점으로 인해 혹평을 받고 있다. 또한 지금은 적지 않은 저명한 수학자들이 지난 50여 년 동안의 부르바키의 수학에 싫증을 느끼며 회의를 하고 있다.

부르바키의 영향력이 예전같이 못하지만 그 후로 부르바키는 1978년에 피에르 데리네, 1982년에 알랑 코네, 2002년에 로랑 라포르궤 등의 필즈상 수상자들을 배출했다. 부르바키가 언제까지 존속할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부르바키는 20세기 후반에 옳은 방향이든 그릇 된 방향이든 세계 수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임에 틀림없다.

 

양재현 인하대·수학통계학부

캘리포니아대(버클리)에서 박사를 했다. 하버드대, 막스플랑크 수학연구소 등에서 초청교수를 지냈다. 「소수의 아름다움」, 『 20세기 수학자들과의 만남』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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