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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일본 제어하려 각국 조계지 설치 계획 … 결국은 쌀 수출항으로
대한제국, 일본 제어하려 각국 조계지 설치 계획 … 결국은 쌀 수출항으로
  • 교수신문
  • 승인 2012.10.1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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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10> - 군산항

 

▲ 1930년대 군산항 부두풍경. 사진제공= 군산근대역사박물관

 

1926년 6월 25일 4시 군산공설운동장에서 사이토 조선총독의 ‘군산만세’ 삼창이 연단의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에서 터져 나왔다. 이를 신호탄으로 군산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집마다 국기와 축하 燈을 내걸고, 학생들은 시가지 행렬로 시내는 축제분위기였다. 이 날은 군산 사람들이 오랫동안 소망하던 군산항 축항공사 기공식이 열린 날이다. 사이토 조선총독이 방문한 것만으로도 식민도시 군산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지만, 만세삼창까지 외쳐주는 총독의 성의에 군산의 일본인들은 식민지 지배자로서의 자존감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군산은 1899년 5월 1일 마산, 성진, 평양 등과 함께 구한국 정부의 칙령에 따라 개항됐다. 과거의 개항이 외세의 요구를 수용하는 수동적 개항이었다면 군산 개항은 조선 정부가 능동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의지의 표현이었다. 대표적 근대건축물인 옛 군산세관은 그 결과물이다.

한국정부는 군산에 각국 조계지를 만들어 일본의 독무대를 제어해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군산항은 조선 정부의 의지와 달리 일본 공업화에 필요한 쌀 수출항으로 전락했다. 일본인들에게 군산은 조선의 대표적인 ‘쌀’ 생산지를 배후지로 두고 있는 무역항으로 성장 가능성에서 매력적이었다.

부둣가에 탑처럼 쌀을 쌓아놓은 풍경

군산의 일본인들은 군산이 ‘쌀의 군산’으로 호명되는 걸 은근히 자랑했다. ‘쌀의 군산’은 테라우치 조선총독이 군산을 방문했을 때 불렀다는 말이 있다. 일본인들은 쌀과 군산의 관련성을 더 끌어올리기 위해 조선시대 稅穀을 모으던 군산창의 존재를 강조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했다.

군산을 홍보하는 다양한 자료에서 부둣가에 탑처럼 쌀을 쌓아 놓은 광경은 다른 도시와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1934년 군산항 쌀 수출량은 약 220만 석으로, 전국 수출량 약 770만석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비중이었다. 같은 해 군산항 총 수출량의 73% 이상이 쌀이었다. 군산항을 떠난 쌀은 대부분 일본의 오사카, 고베, 나고야 등으로 보내졌다. 당시 자료에는 네덜란드나 루마니아 같은 유럽으로도 수출됐음을 확인시켜 준다. 개항장 군산으로 모여든 일본인들은 우선 조선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한 기반시설을 갖추었다.

 

1899년 군산 개항은 조선이 능동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의지의 표현
1934년 군산항 쌀 수출량은 약 220만 석, 전국 규모는 770만 석이었다.
‘쌀의 군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미두장, 1932년에 문을 열어
그러나 군산은 1960~197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전주와 군산을 잇는 국도인 전군가도(1908년 개통)와 호남선 역인 익산에서 군산까지 연결한 군산선(1912년 개통)은 호남평야와 군산을 연결하는 대동맥이었다. 군산역과 부두가 철로로 연결됐다. 호남평야의 쌀이 하루 150량의 화차로 부둣가에 야적됐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항만의 자연적인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네 차례의 축항공사를 추진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뜬다리 부두는 3천톤급 배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위험한 축항공사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인명피해 소식이 신문 모퉁이에 조그맣게 소개되기도 했다. 군산에는 쌀 관련 업종들이 증가했다.

수출용 미곡을 도정하기 위한 정미업이 발달했으며, 운송 및 하역업, 이와 관련한 노동자들이 사슬관계를 이루었다. 특히 쌀 생산에 참여하는 대지주의 농지 투자도 많았다. 개정병원 신관을 농장사무실로 이용했던 구마모토나 발산초등학교 주변을 농장으로 소유한 시마다니의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일본인 지주의 축적 논리는 조선농민에 대한 고율의 소작료 징수였다. 1927년 옥구소작쟁의는 조선농민들의 생존논리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발산초등학교 뒤뜰에는 석탑을 비롯한 수십 개의 문화재가 출처도 모른채 모여있다. 일본인 지주들이 농업만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재 수탈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던가를 짐작케 한다.


조선인들의 활동무대는 ‘송방거리’

근대도시 군산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생활하는 공간이 구분됐다. 일본인 거주지인 북서부 지역에는 관공서가 밀집돼 있었다. 식민도시 경영에 필요한 군산부청, 경찰서, 우편국, 세관, 법원과 같은 관공서는 물론이고,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조선상업은행, 18은행, 동일은행 지점들이 일본인 자본가들의 돈줄이 돼 주었다. 쌀의 군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미두장은 1932년 문을 열었다. 미두장은 일본 오사카 쌀 시세를 기준으로 쌀을 사고파는 일종의 노름판이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던 조선인들이 쪽박을 차는 코스였다. ‘화투는 백석지기 노름판이요, 미두는 만석지기 노름판’이라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로 큰 노름판이 군산의 돈을 빨아들였다. 채만식은 미두장에서 가산을 탕진하는 조선 사람들의 생활을 소설 『탁류』에 적나라하게 묘사한 바 있다. 한편 군산이 개항되자 조선인들도 기회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객주처럼 미곡거래에 참가하는가 하면 정미업에도 참가해 조합을 구성하기도 했다. 일본인 근거지와 떨어진 째보선창 가까운 ‘송방거리’를 중심으로 활동무대를 만들었다.

이 주변으로 구불구불 뱀 모양으로 어지럽게 생긴 마을에는 부두노동자나 축항공사 등 근대도시에서 하층민으로라도 살아가기 위해 군산으로 모여든 조선인들이 주거지를 이뤘다. 일제는 조선인 마을을 위험지구로 인식하고, 여기에만 파출소를 배치해 감시했다. 조선인 마을과 일본인 마을 중간지대에는 근대문화 소비지역이 조성됐다. 군산사람들은 극장, 백화점, 다방, 유곽, 의원, 양약국, 빵집 등에서 근대적인 일상문화를 소비했다.

오늘날 군산에서 가장 유명한 빵집인 ‘이성당(이즈모야)’은 식민지시대 일본식 빵과 과자를 판매하던 곳으로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이 이색음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근대도시로 성장하던 군산은 1960, 70년대 근대화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최근 군산시는 근대유산을 보존하고 문화재로 등록하는 한편,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만들어 근대 식민도시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식민도시의 흔적을 보존한다는 것은 한 도시를 기억하는 과정이다. 기억을 재현하는 방식과 관련해 근대 식민도시 군산을 해석하기 위한 논쟁이 좀 더 다양하게 전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차철욱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조교수

 

필자는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한국현대사가 전공이며, 논문으로는 「5한국전쟁 피난민과 국제시장의 로컬리티」, 「1950년대 한국-일본의 밀무역 구조와 상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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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이 2014-04-04 19:48:13
민정아사랑해

지영이 2014-04-04 19: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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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이 2014-04-04 19: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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