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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 대한 공동체의 자기이해는 언제 찾아올까?
그들에 대한 공동체의 자기이해는 언제 찾아올까?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10.15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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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_ ‘지식인’을 다룬 세 권의 책

지식인에 대한 통렬한 지적이 넘쳐난다. 레지 드브레 프랑스 리옹대 교수는 “과거의 지식인은 시대를 명료하게 해석해줬지만, 지금의 지식인은 시대에 어둠을 더할 뿐이다.”라고 탄식했다. 영국 언론인 겸 작가인 폴 존슨은 “지식인들을 경계하라. 그들이 집단적 조언을 내놓으려들 때에는 특별한 의혹의 대상으로 삼으라.”라고 경고했다. 지식인은 과연 누구인가. 지식인은 어떻게 ‘행동’함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가.

여기 ‘지식인’을 이야기하는 세 권의 책이 해답을 모색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에드워드 사이드다. ‘오리엔탈리즘’으로만 이해되는 사이드의 지적 유산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저서 『지식인의 표상: 지식인이란 누구인가?』(최유준 옮김, 도서출판 마티)는 1992년 BBC 리스 강연록을 모아 출판됐다. 사이드는 자신이 제시하는 지식인은 결코 정파와 진영 논리에 빠져 비판적 언사만 앵무새처럼 내뱉는 인물이 아님을 강조한다. 또한 초월적인 재능에 완벽한 도덕정신으로 무장한 극소수의 인물(소크라테스, 예수, 볼테르 등)은 더더욱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하는 이들은 모두 지식인으로 보는 그람시를 따르면서도, “지식인은 대중을 향해서, 그리고 대중을 위해서 하나의 메시지, 관점, 태도, 철학이나 의견을 나타내거나 구현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인적 존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 자신의 전문 분야에 함몰되지 않는 독립적 지식인은 가능한가? 저자는 전문화된 개별 지식인은 완벽하게 이상적인 존재, 순수하고 고결한 존재가 아님을 일깨우며, 문제에 대해 눈을 감는 지식인의 전문주의의 폐해를 ‘아마추어주의’를 통해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이드의 아마추어리즘은 ‘이윤이나 보상에 휘둘리지 않으며 전문성에 묶이는 것을 거부하고 여러 경계와 장벽을 가로지르는 연결점을 만들어 더 큰 그림을 그리려는 욕구’를 말한다.

아마추어리즘과 집단지성

사이드의 아마추어리즘은 두 번째 주인공 이성재 충북대 교수(역사교육과)가 주장하는 ‘집단지성’과 맞닿아 보인다. 이 교수는 그의 저서 『지식인』(책세상)에서 2008년 ‘촛불 시위’를 예로 든다.

소수의 지성이 사회를 움직이던 시대가 지나가고, 대중이 오히려 지식인을 견인하는 ‘집단지성’이 발현된 사례라는 것이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모든 것이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은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고 이를 익명의 타인과 공유하는 가운데 거대한 힘을 발휘했다. 지속적으로 재평가되고 실시간으로 조정되는 지식의 공간에서 구성원들이 맺는 관계는 직접민주주의 담론 형성과 이질적 구성원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집단지성의 요체’가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견에 대한 배척과 상호비판 기능을 상실할 때 과격한 주장만이 힘을 얻을 수 있음도 경계하고 있다. 그렇다고 저자의 요지를 ‘대중=지식인’으로 곡해하면 곤란하다. “사회는 호혜와 사회성에 기반을 둔 책임과 연대의 복합체이며, 지식인의 의무는 이러한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는 에밀 뒤르켐의 말처럼, ‘독립적 사고, 자율적 태도, 공동의 대의를 추구하는 연대’를 다할 때, 지식인에 대한 신뢰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오히려 9명의 지식인을 소환해 지식인에 대한 신뢰 회복을 모색한다. 그러나 이 교수의 책에서 좀 더 돋보이는 대목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리라.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적 행태는 앎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지식인은 더 이상 누군가를 지도하는 위치에 서지 않아야 하며, 중립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어서도 안 된다.” 19대 대선이 코앞에 이르자 여기저기 대선 주자들 캠프에 줄서기 하는 모습은, 이 교수의 지적을 곱씹어야할 것 같다.

어떤 집단에도 매이지 않고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뛰어넘었던 카를 만하임, 지식으로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유기적 지식인을 제시한 안토니오 그람시, 지식의 보편성과 사상의 자유를 통해 권력에 대항했던 장 폴 사르트르, 권력에 배제된 사람들의 지속적 투쟁을 설파한 특수적 지식인으로서의 미셸 푸코, 정치적 개입이야말로 지식인의 의무라고 주장한 피에르 부르디외를 차례로 보여준다.

이어 지식인의 종언을 고한 레지 드브레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소비문화에 주목해 해석자로서의 지식인을 제시한 지그문트 바우만, 아마추어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를 언급하며 행동하는 대중으로 바뀌어갈 낙관의 시대를 기대한다. 세 번째 주인공, 영국 캠브리지대와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고 미국 뉴욕대에 레마르크 연구소를 설립한 토니 주트.

유대인이면서도 지식인의 시각에서 이스라엘을 편협한 민족국가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저자는 『지식인의 책임』(김상우 옮김, 오월의 봄)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지식인은 망명자(사이드), 약자의 고통에 함께하는 자(이성재 교수)라는 정의를 넘어서서, ‘글이 필요하면 펜을 잡았고, 탄환이 필요하면 총도 잡았던’ 이를 지식인으로 명명한다. 사실 지식인은 프랑스의 발명품이다. 드레퓌스 사건과 더불어 탄생한 지식인은, 이후로 프랑스 사회에 큰일이 터질 때마다 당대의 지식인은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끊임없는 질문을 했고, 시대 역시 그들을 호출했으며, 논쟁들은 세계 각지에 영향을 끼쳤다. 저자는 프랑스 역사에 오롯이 새겨있는 세 명의 지식인의 삶을 조명했다.

시대와 불화했던 그들의 삶

불과 26세의 나이에 세기말 프랑스 문학계를 주름잡은 비평가가 된 레옹 블룸은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고, 사회당 당수를 역임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운동의 목표를 종교와 동일시해 양차 대전 중에 프랑스의 정치를 분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알제리 출신으로 늘 이방인이었던 카뮈는 두 편의 소설(『이방인』, 『페스트』)로 일약 정치적 유명인사가 됐다. 그러나 알제리 독립 지지를 거부함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거부의 이유는 저항의 이유와 동일했다.

프랑스와 아랍, 모두의 범죄를 보며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카뮈가 선택한 저항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르 피가로>와 <렉스프레스>에 수천 편의 글을 기고했고, 78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자 사회학자, 정치평론가, 사회이론가였던 레이몽 아롱을 소환한다. 우파 철학자 아롱은 지적으로 무책임한 행태를 저지르는 지식인들에게 강도 높은 비판의 날을 세워서 동료들의 질책을 받았다. 이 셋의 공통점은? 시대와 불화했던 그들의 삶이다. 사는 내내 꾸준히 오해를 받았던 그들에 대해 저자는 “그들에 대한 공동체의 평가와 자기 이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해질 무렵에 겨우 찾아왔다”라고 말한다. 이 책을 덮을 때면 우리도 그들을 이해하고 대한민국에 사라져가는 지식인들을 다시 만날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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