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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식물에게는 일요일이 없다
원로칼럼_ 식물에게는 일요일이 없다
  • 강병화 고려대 명예교수·환경생태공학부
  • 승인 2012.10.1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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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화 고려대 명예교수·환경생태공학부/(사)야생자원식물소재연구회 이사장
필자는 농과대학과 대학원에서 재배학을 전공하고, 독일에서 잡초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고려대에서 28년간 작물재배학과 야생식물, 자원식물을 강의하다 지난 2월 정년을 맞았다. 독일의 지도교수님께 배운 것은, 식물연구는 식물을 생육시기별로 정확하게 식별한 후 종자를 수집하는 것이 중요하며 ‘식물에게는 일요일이 없다’는 말씀이었다.

귀국 후 우리나라 식물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식물분류학회에 가입해 식물분류학자들에게 식물을 동정하는 방법과 정확한 이름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저명한 식물분류학자인 L선생님께서도 잡초학 연구는 생육시기에 따라 다른 모양의 식별과 종자가 중요하다고 하시며 농학에 관련된 학회지들이 정확한 식물 이름을 표기하지 않는다고 하셔서 무안했지만 몇몇 학회지의 편집위원을 역임하면서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 후 이러한 학문 간의 불통을 해소하고자 29년간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4천일 이상의 현장조사로 생육시기별 사진을 촬영하고 종자를 수집하며 한편으로 문헌조사를 병행해 식물의 우리 이름과 학명을 정리했다. 1만6천장 이상의 생육시기별 생태 사진을 수록하고 남북한 식물이름을 비교한 『한국생약자원생태도감』을 출간했고, 국립수목원과 한국식물분류학회에서 정리한 ‘국가 표준 식물 목록’을 위주로 한 우리나라 식물의 이름과 세계 식물의 학명을 비교해 『자원식물 총람』5권을 출간해 후학들이 식물과학을 연구하는 데에 도움이 되게 했다.

필자가 29년간 현장조사와 문헌으로 특성을 조사한 3천630종류의 우리나라 자원식물 중에서 2천190종이 약으로 쓰이고, 1천527종이 먹거리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식물들은 정확한 약효나 식품으로서의 성분이 규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와 국토환경의 변화로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성숙한 종자를 수집해 재배한 후 그 이용성을 개발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식물분류학자들을 제외하고 농학, 원예학, 임학, 생태학, 환경학, 조경학, 본초학, 약학, 식품학, 영양학 등 식물을 재료로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식물의 우리 이름과 학명을 소홀히 해 연구의 결과를 왜곡하는 경우가 있어도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필자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삼고재배학원론』에서 식물분류학회에서 추천한 우리 이름이 있음에도 오처드그래스(오리새), 앨팰퍼(자주개자리), 화이트크로버(토끼풀), 레드클로버(붉은토끼풀) 등과 같이 영어명의 우리 발음을 사용한 것은 다른 3명의 저자가 농학자임으로 그분들의 주장을 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조사한 결과 남한의 야생식물과 재배식물 4천664종 가운데 북한과 한글 이름과 학명 표기가 일치하는 것은 34.1%인 1천592종에 불과했다. 따라서 학문분야 간의 소통뿐만 아니라 남북통일 후의 식물과학 발전을 위해서도 식물의 우리 이름과 학명 표기의 정리가 필요하다.

우선 모든 식물 관련 연구자들은 각자가 주장하는 견해가 있더라도 국가표준식물목록의 우리 이름과 학명을 따르고, 생육시기별 식물의 형태를 정확히 동정해 연구 결과를 확실하게 발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식물의 모양, 특히 초본식물의 모양은 생육시기와 토양상태에 따라 다른 경우가 많아 숙련된 연구자라도 현장조사가 필수적이다. 국토개발과 기후변화, 산림녹화와 농업환경 변화로 우리의 자원식물들이 사라지고 있으니 종자를 채종해 보관했다가 재배해 연구해야 한다.

필자는 재직시절에 채종한 1천700종에 속하는 7천 점의 종자를 ‘고려대 야생자원식물종자은행’에 기증했고, 지금은 약 30만장의 생육시기별 사진을 정리해 후학들과 국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난 세월은 초본성 자원식물의 종자를 수집하고, 각 식물종의 생육시기별 사진을 촬영하며 문헌으로 그 특성을 조사하면서 보냈지만 이러한 성과는 식물분류학자가 아닌 농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업적이라고 생각된다. 농학자는 식물의 성숙기에 채종하는 습관이 돼 있고, 식물을 잡초와 자원식물이라는 개념으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각 부처에서 생물다양성과 종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종자 수집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초본식물의 발생장소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수집 장소보다는 정확한 식물종을 동정해 성숙기에 채종하는 일이다. 잘못 동정하고 미숙한 종자를 수집한 경우는 훗날 채종자만이 알 수 있기 때문에 채종자의 실명을 기록해 보관해서 책임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동네마다 생태학습장을 만들어 식물의 우리 이름과 학명의 표찰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식물의 발생 상태와 생육의 변화에 따라 표찰을 관리하는 전문가가 없어 실제 식물과 표찰의 이름이 다른 경우가 많아 식물에 관심 있는 학생들과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틀린 식물 이름의 표찰은 없애고 스스로 책을 찾아보며 알도록 하는 것이 더 교육적이다.

강병화 고려대 명예교수·환경생태공학부(사단법인 야생자원식물소재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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