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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빈의 거리, ‘음악’ 속으로 탈주해간 고향 잃은자들
세기말 빈의 거리, ‘음악’ 속으로 탈주해간 고향 잃은자들
  • 교수신문
  • 승인 2012.09.2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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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ㆍ상상ㆍ인문학(23)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2)

 

▲ 엔사무국 뒤편 굴다리 : 빈의 유엔 사무국 건물 뒤를 빙 돌다가, 굴다리를 지날 즈음 벽면에 그려진 야한 그림들을 만난다. 어디서나 인간의 모습은 살아있다.

 

빈, 1276년~1918년 동안 합스부르크家 치하의 제국 수도. 현재 유엔 사무국이 있다기에 거길 둘러본다. 건물 뒤를 빙 돌다 굴다리를 지날 즈음, 벽면의 야한 그림들을 목도한다. 욕망은 어디든 넘실대고. 인간의 원점은 결국 ‘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 가도 가도 떠난 자리(行行到處 至至發處)’아닌가. 갑자기 프로이드가 생각난다. 기존 질서의 상징인 아버지 죽이기, 그게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기존 질서의 부정을 상징한다.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은 대략 애비 없는 자식들 아닌가. 애비를 죽이고 어미를 차지한 놈.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선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밖에. 그럴 때, 얼굴이 없는 고개를 푹 숙인 아버지=남성은 자신의 여자를 얼마나 더 사랑하고 싶어질까.

그래서 그 여자는 옛 사랑의 그림자를 좇아 무릎을 꿇고, 벼랑 끝에서, 발가락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일까.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키스」앞에서, 나는 골똘히 생각에 빠져든다. “유럽문명의 꽃은 지금 이미 활짝 핀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을 본 뒤, 동양인 구메 구니타케는 이렇게 평가했는데, 정말 당시의 빈은 그랬을까. 세기말의 사색 끝, 그 꽃엔 喪家에 바쳐진 화환처럼, 죽음의 향기가 물씬 나진 않았을까.

아버지도 신도 공백이었기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중략)/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라는 기형도의 「빈집」처럼, 빈집=죽음 뒤에 자리한 ‘형이상학적 허무감’. 노발리스가 말하듯 영원은 우리의 내면 말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의 세계는 그림자일 뿐이다. “천국은 비어 있고, 신은 죽었다”(칸딘스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가공할 만한 허무감’이었다”(키리코). 김정설은 말한다. “그들(=서구인)은 區洲 문화의 총 재산 가운데 불안을 벗어날 길은 가톨릭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불안의식이 거기서 일단 정지돼 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의 일화를 든다. “어느 날 서화담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길가에서 지팡이를 놓고 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왜 당신은 그렇게 우는 거요?’라고 물으니, ‘내가 날 때부터 장님이었소. 그런데 오늘 길을 가다가 수 십 년 만에 눈이 뜨였소. 그래서 이 세상을 처음 보는데, 집을 도저히 찾아갈 수가 없어서 이렇게 우는 것이오’ 이런 곡절을 듣던 서화담은 ‘그럼 눈을 잠시 감고 마음을 안정시키시오. 집을 찾아갈 수 있을 터이니’라고 일러주었다.” 여기서 장님은 서구인이고, 지팡이는 가톨릭이다.

 서구인은 가톨릭에 귀의해 당시의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 했다는 것. 기독교의 신이 죽고, 아버지가 사라졌다면, 결국 인간 자신의 내면, 심층의 눈으로 길을 걸어가야만 할 터. 시 「안개 속에서」에서 헤르만 헤세는 읊는다. “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정말 이상하다./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모두가 혼자인 것이다.” 아마도 세기말 빈은 이런 것이리라.

융은 당시 사람들의 무의식에서 기독교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나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현시대는 신의 부재 내지 신이 이미 죽어 버린 시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의 이미지 상실은 곧 인생에 부여돼 오던 최고 의미의 상실을 뜻한다. 천국으로 가는 사다리가 치워지고 길은 자신의 내면 그 아래(심층)로 숨어들었다. 이쯤에서, 세기말 빈, 시대적 상처이자 창조적 성취를 거머쥐었던 유대인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또 얼마나 고달팠을까. 고향을 잃고, 유럽에서, 낯선 이질적 존재로 살아온 자들. 2천여 년 디아스포라(이산). 가슴 아픈 일이다. 국제적 자본을 가진 그들은 한때 중앙집권도 재정기반도 취약했던 서유럽(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으로 유입되나, 효용성이 떨어지면 다시 용도 폐기돼 배척받는다. 세기말 그들은 악의 축이었다. 서구의 산업화 과정에서 낙오한 유럽인들은 그 불만을 유대인 배척으로 해소해간다. 또한 유럽 내의 민족주의, 국수주의가 심화되면서 그 내부적 불안 에너지는 유대인 차별, 학대, 제거로 배설된다. 하지만 빈의 지적, 예술적 풍경을 바꾸었던 탁월한 유대인들.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말러, 쇤베르크, 카를 크라우스, 테오도르 헤르츨. 모두 기라성 같은 인물들 아닌가. 유대인 과학자 에릭 캔덜이 왜 그토록 ‘기억’에 집착했을까. 의식의 심층 속에 위기의식과 고통이 ‘화학적 변화’로 숨어버렸다는 연구는 자신들의 피멍을 들춰내는 듯 측은하다. 노벨상 수상식에서 그는 말했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 위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델포이의 돌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의 뇌에 새겨져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까마득한 세월동안 그 경구는 뇌 속의 분자적 과정들에 의해 인간의 기억 속에 보존되었습니다.”(전대호 옮김,『기억을 찾아서』, 참조). 유대인들이 도피하고 싶었던 정치적 현실은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브람스, 말러, 쇤베르크 등 수많은 음악가들의 소리 속으로도 탈주해 갔으리라.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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