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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함께 추락했다 호네커에 의해 복권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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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12.09.2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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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리드리히 대왕 탄생 300주년 논쟁을 보면서(中)

▲ ‘어디에나 가시는 왕(Der K¨onig u¨berall)’. 로버트 바르트뮐러(Robert Warthemu¨ller)의 회화로 프리드리히를 그렸다. 1886년작.

 

연구년(안식년)을 맞아 독일로 떠났던 최민숙 이화여대 교수(독문학)가 프리드리히 대왕 탄생 300주년을 놓고 독일 문화계가 보이는 상반된 태도를 보면서, 이 갑론을박의 문화적 풍경을 놓치지 않고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3회에 걸쳐 최 교수의 글을 게재한다.

왕좌에 오르자마자 프리드리히는 당시의 계몽주의적 분위기를 수용해 일련의 개혁조치를 실시한다. 고문과 검열을 부분적으로 금지하고 종교 선택에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왕좌에 오른 지 반 년 만에 1차 슐레지엔 전쟁을 일으켜 유럽을 놀라게 했다. 이후 7년 전쟁 등 여러 전쟁으로 인명을 희생하고 국고를 탕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적 환경이 바뀌고, 운도 좋아 영토를 확장하며 프러시아를 명실상부한 유럽의 5대 강국 반열에 올려놓는다. 한편 그는 베를린에 학사원을 부활시키고, 포츠담에 상수시 궁전을 건축해 국내외 학자와 문인들과의 토론을 즐겼으며, 바흐 등 음악가를 초청해 음악회를 연다.

1750년에는 그가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부른 볼테르를 궁으로 초청했고, 볼테르는 그곳에서 역사서 『루이 14세기 시기』(1751)를 완성한다. 그러나 계몽주의적 이념을 신봉함에는 일치했으나 권력과 도덕에 대한 생각이 달랐던 두 사람은 결국 파경을 맞게 되고 볼테르는 베를린을 떠났다. 그의 백성 사랑의 대표적 예로 꼽히는 것은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도입한 감자였다. 농부들은 처음에는 맛이 없다며 저항을 했지만 기근이 들자 감자로 위기를 벗어나게 됐다. 지금은 독일인의 주식이 된 감자.

포츠담 상수시 궁전 그의 묘석 위에는 항상 추모객들이 감사의 뜻으로 가져다 놓은 감자 몇 알이 놓여있다. 모순적인, 너무나 모순적인 프리드리히 2세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다양한 측면을 지닌 인물인지는 그가 “누구나 자기를 투영시킬 수 있는 면을 지닌 인물”이라는 평가에서 드러난다. ‘프러시아의 카멜레온’으로 그는 철학자, 저술가, 작곡가, 플루트 연주가, 건축가이며 군인이고 정치가였다. 아버지와의 갈등에 시달렸고, 여동생과 애틋한 남매의 정을 나눴으며, 볼테르와의 우정을 귀히 여겼다.

그러나 훗날 그는 권위적인 전제군주이자 영웅심과 권력욕에 불타는 전쟁광으로서 아버지와 유사한 모습을 보였으며, 그의 후계자인 조카에게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한 것같이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볼테르와의 우정도 두 사람이 서로를 이미지 메이킹에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펴기도 한다. 프리드리히는 궁정에서 볼테르의 편지를 낭독했으며, 볼테르는 왕의 편지를 갖고 온 파리 시내를 떠들고 다녔다. 심지어 당시 유럽의 가장 저명한 지성인의 하나였던 볼테르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는 오늘날의 CNN에 해당된다는 주장도 있다.

 ‘근검절약하는’ 왕이었다는 평과 나란히 매우 사치스런 파티를 즐겼다는 설도 공존한다. 이 모든 일화들이 얼마나 실제에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으니 오늘날의 ‘기억문화’의 연구 대상이 될 만도 하다. 백성들은 이런 그를 어린 시절에는 ‘프릿츠’로, 장년기에는 ‘프리드리히’로 부르다가, 늙고 노쇠해지자 다시 ‘늙은 프릿츠’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는 친한 친구가 41세로 세상을 뜨자, 자신은 40세도 되기 전에 유서를 써놓았다. “나는 철학자로 살았으며 철학자로서 전혀 화려하지 않게 일체의 격식 없이 묻히기를 원한다. 나를 해부하거나 향료를 바르거나 하지 말지어다.

내가 베를린이나 포츠담에서 죽거든 민중의 헛된 호기심을 위해 나를 전시하지 말고,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자정에 묻도록 하라. 등불 하나로만 비추고 누가 나를 상수시로 따라오지도 말게 하고 테라스에 아주 소박하게 묻어주기 바란다. 밑에서 올라가서 오른쪽, 내가 만들어 놓은 무덤에.” 그러나 이러한 그의 소원은 지켜지지 않았다. 프리드리히의 시신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다가 우여곡절 끝에 재통일 후인 1991년 화려한 격식을 갖춰 그가 원하던 상수시 궁 그의 愛犬들 곁에 묻혔다. 독일사에서 그가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무수한 소영주국으로 나뉘어져 있어 아직 ‘민족주의’나 ‘국가’ 개념이 없던 독일인들에게 그가 일종의 애국주의를 싹트게 했으며, 그로 인해 훗날 독일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다른 국가 국민들의 애국심의 이유가 다양하다면, 프러시아에 대한 애국심에는 오직 이 위대한 왕이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점은 지식인들에 의해 매우 아이러니하게 받아들여진다. 어린 시절 프랑스 가정교사 손에 자란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어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했으며, 많은 저서도 프랑스어로 남겼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어가 높이 평가돼 일상어로도 쓰이던 당시 귀족계급의 관습이었다. 훗날 크리스티안 다니엘 라우흐가 만든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동상 밑에는 프리드리히 시대의 많은 인물들이 새겨져 있는데, 독일의 철학자 칸트와 레싱이 하필 프리드리히가 탄 말의 꼬리 밑에 새겨진 것도 독일어를 무시하던 프리드리히의 성정에 부합한다는 농담도 있다.

프리드리히에 열광한 나치 이러한 모순된 면 때문에 역사 속 인물들과의 관계도 일관되지 않다. 계몽주의 작가 레싱과 사회혁명가인 칼 마르크스는 그를 비방했으며, 사실주의 작가 폰타네와 엥겔스는 그를 칭송했다. 괴테는 그가 죽자 일기에 “마침내! Endlich!”라는 짧은 한 마디를 기록했을 뿐이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장군은 그의 군사적 지혜를 숭배했다. 심지어 1차 대전 후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좌파와 우파 정당 모두에 의해 정치적 선동과 캠페인에 이용되기도 했다.

정당들은 “힌덴부르크에 맞서 프리드리히 대왕을!”이라는 표어를 내걸거나, “노예들을 다스리기에 지쳤다” 혹은 “내 프러시아를 구해주게!” 등 그의 말을 인용하며 표를 구걸했다. 그 얼마 후 히틀러가 제국의 수상이 됐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무자비하게 이용당해야 했다. 히틀러에게 프리드리히는 롤 모델로서 그가 갖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해 영토를 넓혔으며, 훌륭한 저술가이자 예술가였고, 정치가로서도 건축가로서도 이름을 남겼다.

히틀러는 뮌헨 집무실에 대왕의 데스마스크를 두었고, 말년에는 안톤 그라프가 그린 그의 초상화를 여행 때마다 늘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히틀러와 프리드리히를 명백하게 구분 짓는다. 항상 남에게 배우기를 좋아한 프리드리히가 히틀러처럼 겉만 요란하고 속은 텅 빈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나치가 떠들어 댄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프리드리히 열광은 2차 대전 뒤 프리드리히에게 치명타가 됐다. 히틀러와 동일시되면서 그의 명성도 함께 땅에 떨어진 것이다. 구동독의 첫 서기장이던 발터 울브리히트는 그를 나치의 이념적 원조로 내쳤다. 그러나 마지막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그를 다시 복권시켰다. 스스로를 ‘국가의 제일 공복’으로 칭한 그의 계몽주의적 지도자 상과 관용의 정신을 높이 산 것이다.



최민숙 이화여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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