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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만세 외쳤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독립만세 외쳤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9.25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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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역사로 보는 천도교 흥망성쇠

 

▲ 1928년 4월 3일 천도교 서울교구에서 열린 천도교 청년당 제2회 전국대표대회 기념사진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청년대표들로 가득했던 서울교구의 옛모습이 오늘날 중앙대교당의 적막한 분위기와 대비된다.

 

대한민국 7대 종단(기독교, 민족종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천주교)중 하나인 천도교(창도주 水雲 최제우)의 뿌리는 동학이다.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1824~1864)는 동학을 창명했고, 기본 조직으로서 ‘접’을 설치했다. 동학은 천주교로 대변되는 서학에 반해서 나온 민족운동으로 시작해 3대 동학교주인 손병희 때 ‘천도교’로 이름을 바꿨다. 동학을 근대적 종교로 개신하며 근대 문명을 수용한 義菴 손병희는, 녹두장군 전봉준(북접통령)과 우금티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본류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하지만, 시천교, 대순진리회, 증산도는 천도교와 직접적인 종교 모임은 없는 단체들이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사회운동이 잦아들면서 오늘날 천도교도들의 활발한 활동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천도교의 위세는 대단했다고 한다. 기독교의 십자가처럼, 천도교인들은 교당에서 볼 수 있는 흰색 바탕에 빨간 무늬가 그려진 ‘弓乙旗’를 집집마다 달았다. 천도교가 사회적으로 가장 큰 힘을 발휘했을 때는 의암 손병희가 3세 교조로 있던 시절이다.

1905년 12월 1일, 손병희는 ‘천도교 선포’ 이후, 『천도교대헌』을 공포하고 중앙에는 중앙총부, 지방에는 대교구를 설치하면서 교단 체제를 세우고, 쇠망해 가는 국권의 회복을 위한 지도자 양성과 교인 교화에 힘썼다. 이처럼 동학의 창도와 민족운동, 그리고 그를 계승한 천도교 선포의 상징적인 성과가 천도교중앙총부의 설치이며, 이러한 역사적인 전환의 ‘기념비’가 바로 천도교중앙대교당이다. 즉, 천도교를 선포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운 일이 바로 ‘천도교 교당 건축’ 사업이었던 것이다.

손병희는 1907년에 천도교 대도주의 직을 春菴 박인호에게 전해주고, 스스로는 천도교인에 대한 교화 지도와 민족 운동에 주력한다. 천도교단은 1920년, 중앙대교당이 건축될 때까지 손병희와 박인호 체제 속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경운동에 이미 2층 건물 두 동과 별관이 있었지만, 1918년 천일기념식을 맞아 상경한 3천여 명의 교인대표를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손병희는 대교당 신축을 발의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천도교 지도자 대부분이 투옥돼 공사가 지체되기도 했지만, 1920년 12월 말에 준공됐고, 이듬해 봄에는 중앙총부를 비롯한 천도교회월보사, 천도교청년회, 개벽사 등이 경운동 신축 총부 본관 건물로 이전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세워지자마자 장안의 명물이 됐다.

천도교중앙대교당 건축 성금 중 많은 액수가 3·1독립운동 자금으로 소요됐다.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에서 담당했으며,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종일(당시 보성사 사장)은 2만1천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며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인쇄·배포함으로써 3·1독립운동을 돕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항일투쟁의 중심세력, 100만 천도교도의 가가호호마다 달린 弓乙旗의 위세를 경계한 일제의 핍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전주를 비롯한 팔도 곳곳에서 전재산을 날리고 죽음을 당할 처지에 이른 천도교도들은 자식에게 종교를 대물림하지 못했다. 자식이 부모의 종교에 영향을 받는 타종교에 견주어 볼 때, 교세는 자연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천도교의 수난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 상해임시정부와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천도교가 이승만 정권에서 환영받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당시 북한에 있던 60% 이상의 천도교도는, 분단이 고착화되며 다수 세력이 공산정권과 결탁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던 일부는 월남했다. 이승만 정권은 개벽사(현재 중앙대교당의 주차장 자리에 있던 건물, 우이동에 복원돼 있다)에 모래를 투척하는 등 천도교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수운회관에 입주해 있는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의 박길수 대표는 “3·1독립운동의 핵심세력은 천도교였다.

기독교가 1이라면, 천도교가 10의 비율이었다. 투옥된 이들의 숫자는 비슷하지만,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국단위 주도로 확산시킨 이들은 천도교도들이었다”라고 말했다. 천도교의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일 년에 네 번 있는 기념일에도 500여 명 정도가 모일 정도로 교세가 위축됐다고 말하는 박 대표는 “사회는 근대화에 성공했지만, 체계적으로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한 천도교는 1900년 초기에 멈춰섰다”라며 현세태을 안타까워했다. 2012년 가을 초입의 중앙대교당. 부조리에 항거하던 동학혁명의 목소리, 조국의 아픔에 분연히 외치던 만세소리는 적막한 고요로 뒤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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