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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과 민중집회 거점이 된 동학의 최전선
항일투쟁과 민중집회 거점이 된 동학의 최전선
  • 교수신문
  • 승인 2012.09.2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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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9> - 천도교 中央大敎堂

 

▲ 1921년 건축된 천도교 중앙대교당. 운현궁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강렬한 붉은 벽돌과 안정감을 주는 화강석 기단부 그리고 특이한 모양의 중앙탑 지붕이 멀리서도 눈길을 끄는 건물이 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과 인접하여 운현궁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다.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그곳이다. 지금은 매주 일요일 천도교도들이 모여 시일식을 올리는 순수한 종교공간이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투쟁과 민중집회공간으로 더 유명했던 곳이다.

그것은 해방 후 상해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의 “천도교가 없었다면 3·1운동이 없었고, 3·1운동이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임시정부도 없고, 상해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을 것이외다.”라는 감사의 연설에서 잘 나타난다. 많은 근대사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다만 비석이나 기념비로 남아 있지만 중앙대교당은 여전히 남아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건물이 가졌던 의미와 그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그래서 중앙대교당은 한국 근대사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중앙대교당은 1905년 3대 동학교주 의암 손병희(1861~1922)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고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는 인간평등주의를 전개한 후 체계적 조직과 안정된 재정을 갖춘 사회세력으로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추진됐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신축교당이 지나치게 크다’, ‘성금모금을 중지하고 받은 성금은 돌려줘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 등의 이유로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당초 건평 400평 규모로 계획했으나 결국 절반 규모로 축소하여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상해임정, 독립의 공을 천도교에 돌리다
설계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맡고 시공은 중국인 장시영이 담당하고 일본인 기사 후루타니를 총감독관으로 삼아 1918년 12월 1일 중앙대교당 開基式을 거행하였으나 건축비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공사가 잠시 지체되기도 했다. 거기에 건설자재 구입 방해, 시공자 장시영 구금 등 일제의 갖은 탄압 가운데서 1919년 7월 공사를 재개해 1921년 2월 준공했다. 중앙대교당은 당시 명동성당(1898), 조선총독부(1926) 건물과 함께 서울의 3대 건축물로 손꼽혔으며 순수하게 민족의 성금만으로 지은 건물로서는 가장 큰 것이었다. 내부 천정부분은 철제 앵글로 엮어 하중을 벽체로 분산시킴으로써 내부 기둥을 없애고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4층 누각에 올라서면 온 장안의 집들뿐 아니라 집마당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시계가 깊다. 경운동 88번지에는 중앙대교당 외에 1922년 중앙종리원 건물(중앙총부 본관)과 1924년 수운 최제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대신사백년기념관(수운기념관)’이 건립됐다. 이 일대는 가히 ‘천도교 단지’였다. 건축학적으로 중앙대교당은 19세기 유럽의 여러 양식이 혼용된 절충 양식을 나타낸다. 이는 나카무라 건축사사무소에 근무하던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안톤 페러의 영향으로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에서 유행하던 빈 분리파 양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명동성당이 프랑스 신부 코스트의 설계와 감독으로 지어진 것처럼, 당시 지어진 많은 서양식건축물들은 설계자뿐 아니라 벽돌공, 미장공, 목수 등 조선인 기술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외국 기술자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항일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천도교가 신축교당 설계를 일본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의 근대성을 실현하는 역량이 미흡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준공 이후 중앙대교당은 종교의식을 위한 공간뿐만 아니라 3·1독립운동 등 항일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천도교는 기독교와 함께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핵심세력으로, 독립운동 기본계획과 자금 운영, 독립선언서 배포 그리고 해외독립운동 자금 운영 등을 계획했는데 그 거점이 바로 천도교 중앙대교당이었다. 중앙대교당 입구에는 1919년 3·1독립운동 시기에 천도교 대표 등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검토하고 배포하던 장소임을 기념하는 ‘독립선언문 배부터’ 비석이 서있다.

 

▲ 천도교가 주축이 돼 발행했던 <개벽>과 <어린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종일(李鍾一, 1858~1925)이 2월 27일 밤 보성사(현 조계사 서편 경내)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자신의 집(현 수운회관 자리)에 보관했다가 28일 아침 전국 각지로 배포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했고 시위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천도교단이 3·1운동, 6·10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에 자금을 댈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자금조달방식인 誠米制덕분이었다. 교인들이 쌀을 직접 내지 않고 당시 米價로 환산한 돈을 냈기 때문에 1918년 일어난 쌀값 폭등은 오히려 교단의 재정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당시 중앙총부로 들어오는 월성미액은 평균 5~6천원에 이르렀고 1918년 중앙대교당 신축기금으로 300만 교도들이 낸 성금(1호당 10원)이 30만원이었다.

 

기독교측의 자금과 함께 천도교단의 풍부한 재정은 3·1독립운동 추진에 주요한 원동력이었다. 안정된 재정력과 淵源制, 布德制 등 교도들의 체계적인 조직력 덕분에 천도교는 당시 각계의 독립운동을 결집하고 시위를 확산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국내에서는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고 천도교 사상을 종교보다 사회사상으로 강화시키며 문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앙대교당은 <개벽>, <별건곤>, <어린이>, <조선농민> 등 각종 잡지와 서적이 발행되고 문화행사가 열렸던 민족운동과 문화운동의 출발지였다.

출판문화운동의 상징이 된 개벽사와 민족주의 진영의 최대 농민운동조직이었던 조선농민사 역시 이곳에 근거를 뒀기에 ‘개벽사 터’ 기념동판이 현 수운회관 정문기둥에 붙어 있다. 손병희의 사위 소파 方定煥(1899~1931)이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희망입니다”라고 외치던 장소였고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다. 중앙대교당 앞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는 이곳이 어린이운동의 산실임을 증명한다.

각종 문화행사·어린이날 기념식 공간으로
또한 중앙대교당은 수운기념관과 함께 민족의 여론을 대변하는 사자후가 토해진 민간 공회당이었다. 1922년 12월 서울시내 인력거꾼들의 동맹파업 당시 총회,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 대강연회, 1925년 4월 조선 기자들의 조직인 無名會가 주최한 전조선기자대회, 1928년 2월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식, 그해 4월 형평사 창립 제6주년 기념식 등 각종 단체의 집회와 강연회가 이 장소에서 거행됐다.

1960년대 도시계획이 시작되면서 중앙총부 건물과 수운기념관은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중앙총부는 1969년 우이동 봉황각 옆으로 옮겨 보존(현 종학대학원)됐으나 수운기념관은 끝내 사라져 버렸다. 중앙총부가 있던 자리에는 1971년 15층 규모의 수운회관이 건립됐고 수운기념관 자리에는 주차장이 들어섰다.

공윤경 부산대 HK연구교수·도시공학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산동네, 도시재생 연구에 주력하며, 논문으로 「도시 소공원의 창조적 재생과 일상」, 「부산 산동네의 도시경관과 장소성에 관한 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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