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1:10 (목)
[신년시론] 대학개혁 최대의 프로젝트 - 담론의 학풍과 교양교육
[신년시론] 대학개혁 최대의 프로젝트 - 담론의 학풍과 교양교육
  • 교수신문
  • 승인 2001.01.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학개혁, 교양교육 개혁통한 '공공적 지식인' 양성으로
이 광 주 (인제대 명예교수 서양사)

구조 개혁은 정보사회의 출현 및 그와 연동된 글로벌한 세계 공동체의 태동이라는 문명사적인 전환과 깊이 관련된다. 오늘날 이 땅의 공통된 화두는 '구조개혁'이다. 이제 시대적 필연이요 당위성으로서 우리 사회 모든 영역을 압박하고 있는 구조개혁 즉, 자기 혁신에서 대학도 방면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아니 대학이야말로 어느 영역보다도 변혁되어야 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구조 개혁되어야 할 대학의 현실
자기 혁신을 위해서는 자신의 자화상(自畵像)에 대한 투명한 검증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국가 행정의 간섭과 자율성의 결여, 대학 운영과 관리의 관료주의적인 시스템, 재정적 취약성에 크게 기인된 연구와 교육 환경의 낙후, 가부장적 사회의 유풍인 순수 교배(交配)의 교수 인사, 형식적인 업적주의(meritocracy)와 지적 긴장 내지 담론 문화의 부재, 학생 '훈련'을 외면한 지식 전수(傳受)의 학습방법, 심각한 교육 부재 현상 및 구태의연한 입시제도. 이상과 같은 우리의 대학이 처한 전근대적인, 어쩌면 한국적이라고 할 결함에서부터 자유로운 대학이 과연 하나라도 존재할까.
대학의 위상은 그것들을 둘러싼 사회 전체의 반영이요, 그에 더하여 문화 전통의 투사이기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의 대학이 안고 있는 문제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과 읽혀 그만큼 대학 개혁이 어렵다라고 할 것이다. 좋은 사회만이 좋은 대학을 누릴 수 있다는 진실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대중사회 및 고도 기술 산업화 시대에 있어 대학은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사회 속에 존재하며 캠퍼스의 벽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학의 본질에 중대한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대학은 유럽에 있어 12세기 '순수한 학도들의 자유로운 조합'으로서 탄생되었다. 이때 대학은 상아탑이라고 불리우듯 고답적인 학문 공동체였다. 이러한 전통에 큰 변화가 나타난 것은 17세기 자본주의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대학이 전문직(profession) 양성을 주요 과제로서 표방하면서부터이다. 신학부 중심의 파리대학이나 교양인의 육성을 지향한 옥스-브리지와는 이질적인 이른바 근대 대학의 탄생이다. 근대 대학이 배출한 관료·변호사·의사·기술자를 비롯한 각종 전문직은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서 낡은 신분에 기초를 둔 봉건사회를 타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실패한 전문직 근대화 세력
비슷한 현상은 3백년 뒤 늦게 우리에게도 나타났다. 즉 20세기 초 이래 서양의 대학을 모델로 세워진 대학들이 배출한 전문직은 민족 해방운동 및 봉건제 타파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그에 더하여 1960∼70년대 이 땅의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다한 것도 바로 대학이 양산한 전문직이었다. 어느 미국의 비교 고등 교육의 전문가는 대학 모델의 아시아 수용에 관해 "모든 서양적 이념 중에서 (서양의 대학 모델은) 아마도 가장 성공을 거둔 사례일 것이다. 그 성공의 정도는 영국 의회 정치의 그것을 훨씬 넘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과연 그 과찬의 평가에 우리들은 얼마만큼 동조할 수 있을까.
우리의 경우 개화운동에 있어 과거제도의 폐지(1894), 성균관의 폐쇄(1911)는 과거를 뒤엎어 버린다는 근대화를 향한 상징적인 시그널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서양 대학의 제도가 이식된지도 1백년, 우리는 지난날의 봉건적인 교학(敎學) 이데올로기로부터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직 미완의 IMF 사태는 그간의 우리의 경제 발전이 허상임을 드러낸 동시에 그간의 우리의 근대화 작업이 실패였음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우리의 대학은 제도적 측면에서는 서양 대학의 모델을 그런대로 본받았다. 그러나 그 제도를 내면적으로 통괄하고 뒷받침하는, 그럼으로써 대학의 본질을 활성화하는 대학의 이념을 과연 얼마나 배웠던가.
우리의 대학 문화는 정치­경제 문화가 그러하듯이 그 실상에 있어서는 극히 한국적이다. 먼저 대학의 본질이며 그 핵심을 이루는 지적 풍토에 관해 생각해 보자.

'담론' 공동체로서의 대학
대학이란 막스 베버가 표현하였듯이 '제신(諸神)들의 투기장'이다. 즉, 여러 종파와 사상, 신앙과 이데올로기가 서로 맞서고 실험되고 담론되는 지적 연금장(鍊金場)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유럽 대학은 많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그러면서도 지적 열정과 인식에의 의지는 중세 이래 변함없는 대학의 본질로서 면면히 이어졌다. 이 점이 바로 다른 문명권의 고등 교육 기관이 소멸된 뒤에도 유럽 대학이 오늘에 이르도록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며 건재한 이유이다.
유럽 대학의 첫 번째 특징은 '담론' 공동체라는 점에 있다. 그러한 특징은 교수평가에 있어 무엇보다도 '독창성'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이때 독창성이란 새로운 물음을 던지는 주제, 그 해법을 위한 새로운 개념, 그리고 방법론의 독자적인 창출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 1급의 교수는 처음부터 그 자신의 '학풍'을 지닌 이단자(異端者)로서 학계에 등장한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의 '양식'(樣式)을 갖고 나타나는 예술가에 가깝다. 독창적이라 함은 앞선 것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니 담론하는 대학공동체는 또한 비판하고 구상하며 기성관념에 '적대적'(敵對的)이기까지 한 지식인의 육성을 끊임없이 지향한다. 이러한 사실은 학생 '훈련'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세이래 유럽 대학에 있어 학습 방법의 주류를 이룬 것은 '강의'가 아니라 '토론' '세미나'이다. '토론'은 교본을 중심으로 교수가 지식을 전수하는 '강의'와는 달리 학생이 스스로 선택한 테마에 따라 리포트를 발표한다. 그 발표에 이의가 제기되고 학생과 학생간에, 혹은 좌장격인 교수도 참가하여 활발한 담론이 전개된다. 그런데 토론의 본질은 과정과 해법에 의미를 찾고 학생들을 변증법적인 지적 훈련으로 유도하는 점에 있다.
토론의 중요성은 학생의 성적 평가가 그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영국 대학의 경우 대학 평가에 있어 학생 '훈련'은 교수의 연구 이상으로 중요시되어 1백점 만점의 25%를 차지한다. 스스로 인식을 개발하고 자기 자신의 말과 글로써 발표하도록 훈련하는 학풍이다. 그러면 우리 대학의 현실은 어떠한가.
오늘날 우리의 학생들은 말할 줄 모르며 글을 쓸 줄 모른다. 질문도 토론도 없는, '받아쓰기'에 급급한 강의실. 어릴 때부터의 주입식 교육이 대학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이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방법을,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을 강의실에서부터 실천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으로 교수 방법이 개발되고 커리큘럼이 전면적으로 개편되어야 할 것이다. 대학 교육의 목표가 개성과 창조적 인재의 양성에 있거늘 대학 구조 개혁의 첫 번째 과제가 담론하는 학풍의 창출임은 지당하다고 할 것이다. 이 과제와 관련하여 강조되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교양 교육이다.

정보사회 지식인 위한 교양교육
'대학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멀티버시티(multiversity) 즉 다원적 대학의 출현은 지난날 연구와 교육의 균형 위에 이루어진 대학의 전통과 본질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두뇌의 도시'(idiopolis)를 방불케 하는 멀티버시티의 특징은 그 맘모스적 규모 보다도 캠퍼스 전체가 '산업' 과학을 중심으로 편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 이후 미국대학에서 등장한 이 현상은 IMF 이후 '시장 원리'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대학에 있어서도 급속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들은 그러한 현상을 산업­정보 사회의 필연으로만 넘겨 볼 것인가.
정부와 대기업의 자기 중심적 전략에 따른 '산업' 과학의 절대 우위는 학문과 학문간의 그리고 연구와 교육간의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여 바야흐로 대학의 본질을 위협하고 있다.
대학이란 인간과 사회 전체에 관한 '보편적인' 지(知)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사회 속에서 대학은 앞을 다투어 비즈니스화 되고 기술 공학의 연구소화 되는 경향에 있다. '디지털 문화', '인터넷 학원', '디지털 교육'의 난무(亂舞)!
미셀 푸코가 지적하였듯이 지식과 기술은 권력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컴퓨터 앞에 도열한 군상(群像)들에서 죠지 오웰이 '1984년'에서 묘사한 반인간적인 또 하나의 전체주의 체제를 연상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이제 도구적 정보사회의 역기능을 반성하고 치유할 과제에 대학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비인간적인 기술과 도구의 범람을 치유하는 길은 인간(성)의 복권이다. 전통적으로 교양 교육을 중요시한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는 학부 4년은 바로 교양 교육의 과정이며 전공은 전문 대학원(professional shcool)에 진학하여 배우게 된다. 미국에서의 교양교육의 중시는 그 담당 교수가 중진 교수인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교양교육이란 문화 전반에 관련된 '사람됨'의 교육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의 학제적(學際的)이며 종합적인 학습을, 그에 더하여 전문학과의 유대를 끊임없이 지향한다. 진정한 엘리트 계층이란 전문직에 그치지 않는 폭 넓은 교양인이며 지식인이어야 한다. 단순한 전문직의 지배와 관련하여 인문학의 위기가 논의된 지 오래된다. 이는 결국 교양교육의 개혁을 요구한다고 할 것이다.
현재 대학의 연구·교육 환경의 개선 방안이 그런대로 활발히 논의되고, 그 논의에서 미국의 전문 대학원이 한 모델로서 부상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미국의 전문 대학원의 진가는 교양 교육 중심의 학부와의 유대 위에 비로소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이 망각되고 있다. 단지 유능한 전문직이 아닌, 바람직한 사회적 공공성(公共性)을 창출하는 지식인을 형성하는 진정 바람직한 대학, 그러한 대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 활발한 담론이 절실히 요망된다고 할 것이다.

□ 약력 : 1927년 함흥 生.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 충남대 사학과 박사. 하이델베르크대 수학. 충남대 교수, 전주대 사범대 학장 역임. 현 인제대 명예교수. 저서로 『지식인과 권력』『대학사』등이 있으며 '대학사연구회' 회장으로 있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