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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의 전제군주, 그는 ‘살해당한 모차르트’인가?
프러시아의 전제군주, 그는 ‘살해당한 모차르트’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12.09.1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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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리드리히 대왕 탄생 300주년 논쟁을 보면서(上)

▲ 베를린 중심 운터 덴 린덴 거리에 있는 말을 탄 프리드리히 대왕 동상. 크리스티안 다니엘 라우흐(C. Daniel Rauch) 작품. 1851년작.
연구년(안식년)을 맞아 독일로 떠났던 최민숙 이화여대 교수(독문학)가 프리드리히 대왕 탄생 300주년을 놓고 독일 문화계가 보이는 상반된 태도를 보면서, 이 갑론을박의 문화적 풍경을 놓치지 않고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2회에 걸쳐 최 교수의 글을 게재한다.

2012년 여름, 베를린과 포츠담 시내를 거닐다보니 요즘 유행하는 ‘타임슬립(시간여행)’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곳곳에 탄생 300주년을 맞는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II. 1712~1786)의 초상화가 나부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에는 프러시아라는 국가가 오버랩 된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해체되고 없는 국가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왕이라고 불린 프리드리히 2세의 기념해를 맞아 독일에서는 그에 대한 전기는 물론, 그의 저서와 문학작품, 기사 등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산을 이룬다.

예를 들어 독일 인터넷 아마존 서점 검색창에 ‘프리드리히 2세’를 치면 3만 8천 건이 넘는 정보가 뜬다. 그런데 전시회와 신문기사의 제목들은 흔히 영웅을 찬미하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프리데리지코(Friederisiko)’. 프리드리히 대왕의 ‘발명품’이라는 포츠담 시에 그가 건축한 상수시 성에서 올 4월 28일부터 10월 28일까지 열리는 전시회 제목이다. ‘프리데리지코’는 프리드리히와 리스크의 합성어로서 리스크를 좋아한 프리드리히라는 뜻이다.

내게는 독일어로 평화라는 뜻의 프리데(Friede)를 연상시키며 평화에 대한 리스크(위험요소)였던 인물 프리드리히로 읽힌다. ‘프리드리히 대왕. 추앙받고. 이상화되고. 저주받고’. 올 3월 21부터 8월 26일까지 베를린 독일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 제목이다. 원래 7월 29일까지였는데 성황으로 한 달 정도 연장됐다. 독일 주간지 <디 자이트>의 작년 11월 24일에 실린 기사 제목은 좀 더 노골적이다.

‘프리드리히 대왕. 천재인가? 호모인가? 나치인가?’. 이렇게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제목들이 프리드리히 대왕을 따라다니는 것은 1740~1786년까지 근 반세기 동안 프러시아를 지배하며 유럽 5대 강국의 하나로 도약시킨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평가가 단순치 않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의 탄생 300주년을 둘러싼 독일인들의 관심이 자칫 군국주의와 동일시되는 프러시아 향수로 오해받는 것을 비켜가고자 한 의도로도 읽힌다. 필자가 포츠담 상수시 성에 이어 방문했던 베를린 중심가 훔볼트 대학 옆 독일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프리드리히 대왕.

추앙받고. 이상화되고. 저주받고(Friedrich der Große. Verehrt. Verkl¨art. verdammt)’ 전시회에는 1천 제곱미터에 이르는 13개의 공간에 450개의 전시물이 전시돼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실물크기의 초상화와 함께 프리드리히 대왕의 데스마스크와 그가 臨終때 입었다는 하얀 셔츠가 방문객을 맞았다. 그의 방대한 저서와 작곡은 물론, 18세기 유행으로 백성들이 거실을 즐겨 장식했다는 그의 초상화와 미니어처, 그에 관한 수많은 캐리커처, 프리드리히 곰 인형, 심지어 전쟁에 패한 히틀러가 역시 전쟁에 패하고 도망가는 프리드리히의 궁둥이를 쫓아가는 러시아 화가가 그린 캐리커처 포스터까지.

안내원은 실제로 프리드리히가 그렇게 도망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프러시아와 프리드리히 대왕이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은 물론, 유럽에서 이렇듯 관심과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 관심의 성격은 천차만별이다. 애정 어린 시선과 존경의 念에서부터 냉소적인 비판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그 첫 번째 이유를 그의 천재성과 모순성에서 찾는다. 철학자이자 예술가였으며, 『안티 마키아벨리』의 필자인 그는 젊은 시절 폭력적인 부왕과의 갈등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왕이 되자마자 강력한 전제군주로 정복 전쟁을 이어갔다.

그는 ‘살해당한 모차르트’(하이너 뮐러)인가, 계몽전제군주인가? 군국주의의 상징인가? 과연 그는 희생자인가, 가해자인가? 프리드리히에 대한 독일인과 유럽인들의 관심은 그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된다. ‘군인의 왕’으로 불린 아버지 빌헬름 1세는 군사력과 경제력만이 유럽에서 프러시아의 지위를 강화해준다고 믿었으며, 아들도 그렇게 강력한 후계자로 만들고자 했다.

젊은 시절부터 철학과 예술에 심취해 시를 짓고 작곡을 하고 플루트를 연주했던 프리드리히는 매질도 서슴지 않던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과 후계자 수업에 시달려야 했다. 프리드리히가 그의 누이동생에게 쓴 편지는 부왕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아침에 나를 부르신단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아버지는 내 머리채를 붙잡아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그 강한 두 주먹으로 내 가슴과 온 몸을 실컷 두들겨 패 시험해 본 다음 나를 창문으로 끌고 가지. 그리고는 커튼에 달린 줄을 내 목에 감는단다.” 18세의 나이에 그는 친구와 함께 영국으로 도주를 감행했고, 중간에 잡혀 탈영으로 간주돼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빌헬름 1세는 그와 함께 도주에 가담했던 친구인 카테 소위를 그의 눈앞에서 처형했다.

▲ 68세때 프리드리히2세는 안톤 그라프가 그린 초상화다.
이를 지켜보던 프리드리히는 기절했다고 전해진다. 신하들의 청원으로 감형돼 목숨을 건진 아들은 그 후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후세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경험이 프리드리히로 하여금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위장하고 연출하는 데 익숙하게 했다고 본다.

특히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 결혼을 통해 아버지와 화해했지만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왕비를 다른 성에 머물게 하고 공식적인 행사에서나 만났다고 한다. 프리드리히에게 동성애적 성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은 없다. 다만 프러시아 군대에서 결혼한 장교가 드물었던 이유를 이러한 왕의 성향과 연관 짓고는 한다. 그는 28세까지 베를린 근교 라인스베르크 성에 머물며 예술가와 학자들과 교류하며 음악, 문학, 미술 등 예술과 철학, 역사에 심취해 지냈다. 1738년 첫 교향곡을 작곡하며, 그 이듬해에는 그와 서신을 교환하던 볼테르의 조언을 받아가며 저서 『안티 마키아벨리』를 펴내기도 했다.

이 저서는 전제군주의 덕을 기록한 것으로, 자신은 마키아벨리즘과는 전혀 다른 인도주의적이며 계몽주의적 통치를 할 것을 약속한 것이었다. 1740년 부왕의 서거로 왕위에 오른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프리드리히는 볼테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요컨대, 친애하는 볼테르여, 우리는 우리 운명의 지배자가 아니오. 사건의 소용돌이는 우리를 낚아채어가고, 우리는 그렇게 끌려갈 수밖에 없소. 나를 그저 열심히 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조금은 회의에 사로잡힌 철학자로, 그러나 진실한 친구로 보아주기 바라오. 제발 나를 그저 인간으로서만 대해 편지를 써주시오. 내 직함, 이름, 그리고 다른 명예는 경멸하시기 바라오.” <계속>


최민숙 이화여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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