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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담론의 그늘을 파고드는 시선들 … 大選 셈법도 제시
인문담론의 그늘을 파고드는 시선들 … 大選 셈법도 제시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9.17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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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호 계간지 리뷰

태풍이 지나갔지만, 진짜 큰 태풍이 아직 남아 있다. 무더웠던 여름 내내 치열하게 한국사회를 고민한 계간지 가을호들은 이 태풍과 어떻게 마주하고 있을까. <문학과 사회> 99호, <문화/과학> 71호, <오늘의 문예비평> 86호는 국내 수입 이론가들의 지식지형도,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 치유담론 등을 특집으로 내걸고 대학 내 학술동향과 대중사회의 인문학 흐름과 민주주의를 거듭 고민했다. <창작과 비평> 157호는 2013년 체제를 위한 경제·민주개혁 과제들을 파고들었다. <황해문화> 76호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여러 가지 시선을 특집으로 제시했다.

 


국내 진보진영의 사상지도와 계보, 현실태를 파악하려면 이번 <문학과 사회> 99호는 놓쳐서는 안 된다. 특집 「‘그들’ 이후, 이후의 ‘그들’」은 1990년대 이후 국내에 수입된 이론가 중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들 중 세 사람, 라깡, 조르조 아감벤, 데리다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김석 건국대 교수(자율전공학)의 「한국 사회와 정신분석」은 지난 7월 한국을 다녀간 슬라보예 지젝을 통해 국내 라깡주의의 수용 현황을 짚어봤다. 마르크스주의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이론적 지침이라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이뤄진 것처럼 라깡주의 역시 1990년대 활발해진 문화연구의 유력한 프리즘으로 수입됐다는 분석이다.

지젝 이전과 이후 시기로 구분해 라깡을 비롯한 정신분석 이론의 국내 수용사와 지식인 지형도를 그려내고 임상연구와 철저한 번역서라는 이론적 과제까지 제시했다. 박진우 성균관대 강사(비교문화협동과정)는 「조르조 아감벤-남긴 것들, 그리고 남길 것들」에서, 여전히 저술 활동을 진행중인 아감벤의 사유 전모를 논하기는 이르지만, 1995년 출간된 『호모 사케르』의 많은 논의들이 국내의 ‘법’을 둘러싼 무수한 사회적 논란과 유사함을 통찰해 낸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이동연 신임 편집인을 비롯, 26명의 젊은 진보적 소장학자들이 대거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문화/과학> 71호는 문화행동을 특집으로 새로운 20년의 서막을 열었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는 「양날의 칼: 포퓰리즘, 민주주의, 문화행동」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대중선동’적인 포퓰리즘을 경계했고, 고병권 수유너머 연구원은 「민주주의, 그 새로운 무한정성-월가 점거 운동에 대한 하나의 보고」에서 ‘불가능’을 자각할 때만 어떤 ‘가능’이 열린다는 체험에 주목했다.

‘치유의 인문학’이 놓친 것
구조의 실패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개인의 좌절은 이미 재독한인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지적한 바 있다. 오는 11월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2회 한국-유네스코 세계인문학포럼의 주제도 ‘치유의 인문학’이다. TV를 비롯한 미디어와 출판계가 앞 다퉈 ‘힐링’으로서의 인문학을 내세우고 있는 경향을 <오늘의 문예비평> 86호가 날카롭게 비판했다. 특집 「치유의 불가능성」에서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어영문학)는 힐링 산업이 득세하는 이유를 엠비 정권 이후 더욱 심화된 경쟁주의, 재벌 중심의 기형적 경제정책, 턱없이 모자란 사회복지 시스템, 입시준비기관으로 전락한 학교 등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내면의 고통의 원인을 그저 혹독한 경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외로움이나 스트레스라고 두루뭉술 넘길 것이 아니라, 한국자본주의의 구체적 실상과 그 안에서 사람들이 받는 고통의 실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도외시한 채 문제의 해결책을 개인적인 자기성찰, 태도, 마음가짐으로 돌리지 말라는 날카로운 제언으로 읽힌다.

박시성 고신대 교수(의학)는 「예술은 치유가 아니다」에서 라깡을 소환한다. ‘변화’를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문학과 영화가 ‘치료’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면, 커피치료, 삭발치료도 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예술치료계에 적지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창작과 비평> 157호는 특집 「2012년 대선과 민주개혁의 과제들」에서 중도주의, 연합정치, 시민정치, 천안함으로 보는 한국 민주주의 미래를 폭넓게 사유했다. 백낙청 편집인은 ‘2013년 체제 만들기’가 목전의 승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안이한 낙관에서 연유했다고 「2013년 체제와 변혁적 중도주의」에서 반성하면서, 2012년 대선의 최대변수 안철수 교수에 대한 ‘정치공학적 계산’을 요구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대선 국면에서의 연합정치와 시민정치」에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연합’이 가져온 승리의 역사를 돌아보며 지난 4월 총선의 실패를 곱씹는다.

엇나간 ‘2013년체제’ 전망 수정
<황해문화> 76호가 여야간 기본 개념조차 공유되지 못한채 백가쟁명하고 있는 ‘경제민주화’를 특집으로 내세운 것은 시의적절한 선택이랄 수 있다. 다만 논의가 원론적인 수준에서 거듭되고 있는 느낌은 아쉬운 대목이다. 박순성 동국대 교수(북한학)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경제민주화」에서 애덤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을 빌려 경제민주화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평등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상태임을 주장한다.

또한 경제민주화의 문제가 결코 경제 영역에 제한되지 않고 정치공동체의 자유와 정의와도 연결돼 있음을 지적하며 국내의 현실이 밀이 한 세기 전에 말한 지점보다 후퇴했을 지도 모른다고 진단했다. 반면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경제권력으로서의 재벌과 사회적 통제」에서 화석화된 완전경쟁과 가격의 경직성을 들어 케인스 주의가 오해받고 있음을 논증해낸다. 박경로 경북대 교수(경제통상학)는 「공정경쟁과 복지의 제도화-미국의 경우」에서 대공황에 대응해 민주주의를 지켜낸 뉴딜정책을 재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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