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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口號만 빌려다 선거에 이용한다면
원로칼럼_ 口號만 빌려다 선거에 이용한다면
  • 안두순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경제학
  • 승인 2012.09.17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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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순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경제학
연말 대선을 앞둔 요즈음 ‘경제 민주화’가 화두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은 아직 제시된 것이 없다. 논자들 간에, 정당들 간에, 또 같은 정당 내에서도 경제민주화의 내용이나 실천방안에 대한 합의점은 없고 논의들만 분분하다. 경제민주화란 과연 무엇인가. 역사적 경험적 사실들을 간단히 살펴본다.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부작용 제거를 위해서 주요 의사결정에 근로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노동조합의 주장이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 반영되고 1920년에는 사업장협의회법(Betriebsrategesetz)이 제정되면서 작업장 민주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경제민주화가 이론적 틀을 갖춘 것은 1960년대 초였고, 그 후 많은 구상과 프로그램들이 개발돼 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경제민주화는 사회적 시장경제 및 조합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면서 빈부 격차와 독과점 체제 등 자본주의의 폐단을 근로자도 참여하는 의사결정기구를 통해서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반면 조합주의는 1원1표 또는 1주1표라는 자본주의식 의사결정 대신 1인1표주의, share holder 대신 stake holder 중심의 의사결정과 이윤극대화 논리 대신 고용과 연대(solidarity)를 우선한다.

지금까지 유럽대륙에서 실천된 경제민주화의 요소들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노·사·정 공동 보조(concerted action)나 대타협, 노·사·정 협의 기구를 통한 거시경제적 의사결정에 노측의 참여 확대. 둘째, 노·사 공동결정제도(co-determination)를 통한 대기업의 투자 및 고용정책에서 근로자의 발언권 확대. 셋째, 사업장협의회 제도의 정착을 통한 작업장 민주화와 직장 내 노·사 간 협력을 제도화시킨 것 등이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정형화된 모형은 아직 없다. 다만 지금까지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이념보다 시장실패를 치유한다는 차원에서 점진주의적 접근이 우선됐다.

이러한 추세는 2010년 4월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새 강령에서 변화를 겪는 듯했다. 새 강령은 민주주의의 최고가치인 정의 실현을 위해서 정치적 민주주의 외에 경제적 민주주의도 관철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경제적 의사결정에도 근로자가 참여해 자본주의 부작용을 제거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회주의식 구상과 차별성이 없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강한 비판에 부딪히면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모든 사회 정치적 용어가 그러하듯이 경제민주화 역시 역사적, 사회정치적, 그리고 특히 국가와 시대적 맥락 없이 그 실체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본고장 유럽에서 최근 부활을 시도했지만 이내 수면 밑으로 잠복했던 체제 이념으로서의 경제민주화가 2년이 지난 이제 다른 옷을 입고 한국에 나타났다. 한국에서의 경제민주화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지금까지의 논의로 미뤄 민주적 가치로서의 경제정의 실현보다는 경제력 집중 억제나 재벌 규제를 통해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겠다는 도구적 성격을 중시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세대는 민주화라는 단어를 많이 들으면서 살아왔다. 민주화는 더 좋은 세상에 대한 정치권의 국민에 대한 약속이다. 동시에 민주화라는 단어에는 과거의 투쟁과 더 좋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내포돼 있다. 이 점은 현재 화두로 떠오른 경제민주화에도 적용된다. 어느 정당이건 구호만 빌려다가 선거에 이용하는 전략에 머문다면 진정한 경제민주화를 향한 또 다른 범국민적 투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안두순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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