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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삼창 하는 늙은 참배객 … 삼일문 밖에선 드잡이도
만세삼창 하는 늙은 참배객 … 삼일문 밖에선 드잡이도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9.10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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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현장스케치_ 탑골공원, 안과 밖의 세계

 

▲ 탑골공원의 밖은 전혀 다른 세계다. 닫힌 삼일문 밖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간다.
 

‘탑골공원’. 서울 종로에 위치한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1888년에 개원한 인천의 만국공원-인천 자유공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다). ‘파고다공원’으로 부르다가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면서, 공식명칭 ‘탑골공원’으로 호명되기 시작했다. 면적은 1만5천720㎡로, 축구장의 두배보다 좀 더 넓은 크기다. 공원 안에는 팔각정과, 보호막에 의해 ‘보호’ 받고 있는 원각사지 10층석탑, 대원각사비, 앙부일구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동상, 한용운 기념비 등이 있다. 1980년대 초에 공원을 막고 있던 파고다 아케이드를 철거하는 등 주변을 정리하고 공원부지를 확장했으며, 서문·북문 등을 복원하고 공원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투시형 담장을 설치했다.

 

 1987년부터 무료로 개방해 많은 시민들에게 도심 속의 아늑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탑골공원’은 어쩌면 섬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제국주의로 흘러가는 列强들의 시선이 이 땅에서 교차할 무렵, 그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대에 탄생한 풍경으로서의 공원은 지금 四圍가 온통 현대식 빌딩과 건물 가득한 곳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그 속에 옛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기억한 채 머무르고 있으니, 과연 시간이 정지했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주로 찾아오는 이들도 나이 지긋한 노인층이다 보니, 공원 주변에는 이들을 상대하는 이발소, 식당 등이 즐비하다. 2012년 9월의 첫 토요일 오후. 빛이 물결처럼 나뭇잎 뒤로 내려앉고 있는 탑골공원 안에는 관람시간이 거의 끝난 탓인지, 서둘러 사진을 찍고 있는 외국인 몇 사람과 발길을 재촉하는 시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이들이 있었다. 의암 손병희 동상 앞에서 만세삼창을 부르는 여섯 명이다.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서 왔다는 신왕규 옹(80세)과 그의 일행이다. 신 옹은 직접 붓으로 쓴 ‘독립선언서’와 가지고 온 무궁화와 태극기를 동상 좌우에 헌정한 뒤 일행과 참배한 직후인 듯했다. 멀리서 봐도 그들이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다는 것은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정신을 기르자는 거죠.

삼일정신… 자꾸 민족정신을 잃어가는 거 같아 매달 초하루에 한 번씩 찾아와요. 일주일에 한 번 올 때도 있고. 올 때마다 새롭게 독립선언서를 써 와서 특별한 분에게 증정하고 있어요.” 그는 김영삼 씨가 대통령을 하던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탑골에서 하면 시끄럽다고, 관광지라고 소리 높이면 안 된다고, 일본인들이 싫어할까봐 여기 와서 하게 됐지”라고 설명하는 그는 눈빛이 정정했다. 6시가 가까워지자 퇴장을 요청하는 공원 관리인들의 목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탑골공원은 오전 9시에 문을 열어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다. ‘삼일문’ 밖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다.

엠프 스피커에서는 ‘독립군가’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길바닥에는 ‘한일군사협정폐기’를 주장하는 단체가 전시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정치적 내용을 담은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체격 좋은 초로의 한 사내가 이런 전시가 못마땅했는지 행사 주관측에게 따지고 들었다. 욕설이 오가고 시비가 순식간에 몸싸움으로 번지는 듯했다. 그의 입에서는 간헐적으로 ‘shit’, ‘shit’ 영어 단어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이 풍경은 되풀이 되는 일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1919년 만세운동이 시작된 탑골공원, 폐관 시간에 맞춰 공원 정문이 굳게 닫히면 공원 밖의 풍경에는 더욱 속도가 붙는다. 공원은 외부 세계와 완벽하게 차단된 채 섬처럼 그렇게 떠 있을 것이다. 밤새도록.

 문이 닫힌 탑골공원은 옛 시간에서 풀려나 2012년 9월 서울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처럼 비쳐졌다. 멀리 광화문 쪽으로 햇빛이 물들어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나가, 나가 싸우려 나가. 나가, 나가 싸우려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 스피커 소리는 더욱 크게 울렸다. 이게 무슨 노래냐고 서로 물으며 어깨를 으쓱하면서 ‘글쎄?’표정을 짓는 젊은 커플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공원의 긴 담장 아래로 어깨가 축 쳐진 노인들이 보였다 사라졌다 반복하고 있었다.

탑골공원 언제 만들어졌나

‘파고다 공원’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약간 견해가 갈린다. 광무 원년인 1897년 탁지아문 고문관으로 와 있던 영국인 J.M.브라운의 발의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반출 문화재에 대한 기록발굴과 뒤틀린 근대 역사의 흔적들에 대한 글쓰기에 전념해 온 이순우 씨는 견해가 다르다. 인터넷 카페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http://cafe.daum.net/distorted)’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공원 조성 시기를 1897년으로 단정 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경성부사』에 기록된 ‘고종시대 광무의 초년’이라는 구절을 마치 1897년을 지칭하는 것인 양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오류인 듯싶다.

실제로는 공원이 건립된 시기를 1899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바로 그해에 ‘공원건축계획을 반대 운운’하는 내용의 공문서가 작성된 흔적이 수두룩하고, 실제로 <제국신문>의 기사 등을 보면 탑골의 민가를 헐어낸 때가 1899년이라고 확인되는 까닭이다.

물론 브라운이 ‘탑동의 석탑 부근에 있는 민가를 사들여 석탑과 비석이 있는 곳을 중앙에 놓고 공원을 만들어 대중들에게 행락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 금액을 배정’하는 일을 한 것 역시 1899년의 일로 확인된다. 따라서 공원이 완공된 시기는 1900년 이후가 될 수 있을 지라도, 적어도 1899년 이전에는 파고다공원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이순우, 『테라우치 총독, 조선의 꽃이 되다』-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을 뒤지다 1, 하늘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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