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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의 편리성 꾀하는 정책은민주주의 원칙과 맞닿아 있다”
“의사소통의 편리성 꾀하는 정책은민주주의 원칙과 맞닿아 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9.10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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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 『한글 민주주의』 펴낸 최경봉 원광대 교수(국어학)

‘민족주의를 넘어 열린 한글 사용을 생각한다.’ 최경봉 원광대 교수(국어학)가 최근 출간한 『한글 민주주의』(책과함께, 2012)는, 언어와 문자를 정신과 가치관의 문제보다는 생활의 문제로 볼 것을 요청하면서 이런 말을 내세웠다. 과연 민족주의를 넘어서 한글 사용이 가능할까? 저자는 한글을 둘러싼 담론과 정책이 민족 문제를 끌어안으면서 ‘민주주의’ 문제를 고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한글날을 한 달여 앞둔 지금, 과연 그의 주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한글 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주장과 생각을 정리한 최 교수를 이메일로 만나봤다.

△ 책의 제목이 매우 인상적이다. “‘한글’이란 단어를 정확히 사용한다면 ‘우리 문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만 써야겠지만,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한글’을 ‘우리말과 우리 문자’를 아울러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나는 이러한 혼동이 우리의 언어의식에 한글과 한국어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과 상처가 착종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만들어져 일제강점기 내내 우리말과 글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사용됐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경험과 상처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모두 ‘한글’이라는 이름에 새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말과 글을 ‘한글’로 명명하며 이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한글과 관련된 많은 문제를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한글’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고 싶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사회적 의사소통의 편리함을 극대화하는 정책이 민주주의의 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한글’과 ‘민족주의’의 자연스러운 조합을 ‘한글’과 ‘민주주의’의 부자연스러운(?) 조합으로 바꿨다.”

△ 근대 초기의 국어 정책이 어떻게 민권을 향상시켰는지 살펴보았는데, 함의가 있는가. “근대초기 한글 중심의 국어정책은 脫中華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는 일환으로 추진됐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한글이 전근대 시기부터 평민들의 문자로 사용됐고, 평민들의 자의식이 강해지면서 한글의 사용영역이 점차 넓어졌다는 사실이다. 근대 초기 국어정책이 탈중화를 모토로 진행된 정책의 하나였지만, 이 정책이 한글의 사용영역이 확대돼온 역사적 맥락 하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한글 중심의 국어정책은 근대적 민권의식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다.

근대적 국어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국어정책은 민권을 의식하며 정책의 방향을 모색해왔다. 근대 국어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말 규범화 사업은 수많은 논쟁을 거치면서 추진됐는데, 이 과정에서 제시된 각종 방안이 의사소통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대중의 편리성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제안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제안이든 의사소통에서 대중들의 권리를 의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책이 의사소통에서 대중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이 될 수 있는지 판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오늘날 또는 미래의 국어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최근 우리 사회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는 ‘다문화’ 즉 이주민을 위한 이중어 교육 까지 제안하고 있다. 이중어 교육이 어떤 점에서 한글문화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가. “이중어교육은 언어를 가르치는 기능교육으로만 보면 안 된다. 이중어교육은 개별 모어의 의미와 역할을 깨우치는 교육이면서 동시에 공통어의 의미와 역할을 깨우치는 교육이기도 하다. 이것이 일반적인 외국어 교육과 다른 점이다. 외국어 교육이 실용의 관점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이중어교육은 우리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또 다른 우리’의 모어를 공유하며 사는 길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우리말로 생산된 지식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 함께 사유하는 일과, 다른 언어로 생산된 지식을 우리말로 번역해 함께 사유하는 일이 우리말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이뤄진다면 그것 또한 우리말 문화가 풍성해지는 것일 수 있다.”

△ 요즘 대학 교수 임용에서 국학 분야에서조차 ‘영어 강의’ 면접을 치른다. 우리말로 학문하고 그 결과를 우리말로 설명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어렵지 않나. “영어 강의와 영어 논문을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학문이 국제경쟁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서는 발전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은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학문 활동은 학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배경으로 이뤄지는 것이고, 공동체의 문제의식을 이론화하고 공동체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학문 활동의 중요한 목적임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말로 학문하고 그 결과를 우리말로 설명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말로 하는 학문과 우리 공동체의 문제의식이 심화되고 풍부해질 때 학문의 경쟁력도 생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특정 문제의식이 우리 공동체 내에서 폭넓게 공유돼야만 그 문제의식은 더욱 심화될 수 있고 이는 학문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대학은 그러한 활동이 이뤄지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그런데 우선순위를 뒤바꿔 대학의 학문적 수준을 영어 강의의 빈도와 국제 저널에 실린 논문의 수로 판단하는 것은 대학 정책의 천박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태라 할 수 있다. 언어와 문자의 민주적 선택이라는 것은 곧 그 공동체의 현실과 관습을 고려하는 선택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고 그 결과를 우리말로 설명하는 일은 우리사회에서 학문하는 이들의 의무이자 권리라 할 수 있다. 그 의무와 권리를 우선순위에 놓고 학문의 국제경쟁력을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 결론의 한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제는, 우리말과 글의 특별함과 소중함을 강조하면서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다.” 그렇지만 한 달 뒤면 한글날인데, ‘한글문화’가 여전히 소외돼 있지 않은지. “그간 우리는 우리말과 글의 특별함과 소중함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우리말과 글이 왜 특별하고 왜 소중한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말과 글이 어떤 역할을 하고 우리 삶을 어떻게 윤택하게 하는지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말과 글의 특별함과 소중함만을 강조한다면 그 특별함과 소중함에 대한 의식도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특정 외래어에 과도하게 민감하고, 특정 고유어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완고한 규범이 언어생활을 혼란에 빠트리는 일을 우리말 지키기라는 명목 하에 방치하는 등의 일이 일어나는 것이 왜곡된 국어의식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말의 소통을 어렵게 하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둔감한 경우가 많다. 각종 행정조치와 사전 검열 등을 통해 국어순화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갔던 1970년대에 난해한 문장과 비문으로 가득 찬 행정문서와 법률문서가 양산됐고 그 흐름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글날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 마디만 하겠다.

한글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청소년들의 언어습관이다. 그러나 청소년 언어문제의 근원은 교육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비속어나 외래어나 언어 질서를 파괴하는 표현들이 우리말 문화를 어지럽히는 주범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청소년들이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이를 모델로 글을 쓸 수 있도록 독려하는 교육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데서 찾을 필요가 있다. 청소년들이 공교육에서 소화할 수 없는 수준의 수학 문제와 영어 문제에 짓눌려 좋은 글을 맛볼 기회를 잃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좋은 음식을 다양하게 먹어본 사람이 요리도 잘하는 법이다.”

△ 앞으로 저술 계획이 궁금하다.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저술 지원으로 근대국어학사를 집필 중이다. 이 책에서는 근대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문제를 다룰 것이다. 연구자로서 이 책이 국어학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 연구를 심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2015년경 이 책이 출판되고 나면, 한국어 문체의 변천 맥락을 짚어보는 책을 집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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