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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대중 연결하려던 ‘지식 지형도’가 흘린 눈물
학계-대중 연결하려던 ‘지식 지형도’가 흘린 눈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9.03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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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편집자가 뽑은 문제작 ⑨ 책세상

1986년 “책을 통해 세상을 만든다”라는 깃발을 들고 출범한 이후, 책세상(대표 김직승)은 지금 ‘살아 있는 한국문학선’, 그리고 니체, 릴케, 까뮈 등의 외국 저자들의 전집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다. 특히 ‘정본 전집 출간의 방향’을 제시하겠다는 의욕까지 넘쳐난다. 그런 책세상이지만 ‘한국 지식 지형도’ 시리즈를 속상한 사례로 꼽고 있다. ‘한국 지식 지형도’ 시리즈는 학문 연구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고 시장 논리에 의해 홀대받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탁월한 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논문들을 통해 학계와 대중의 소통을 매개하고, 우리 학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현 단계 우리 학문의 지형도를 그려보려는 의도에서 기획됐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학문이 한국 사회에 어떤 진단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려 했다.

구체적으로는 학문 분야별로 1990년대 이후 발표된 논문 가운데서 우리 학문의 문제의식과 이에 걸맞은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는 글 15~20편을 선별해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었다. 책세상이 이때 제시한 논문 선정 기준은 지금도 눈여겨볼 만하다. △발표 시기와 상관없이 현 시점에서 유효한 문제의식을 담은 논문 △주제와 방법론에서 새로운 모색과 독창적 주장을 보여주는 논문 △주제와 성격이 비교적 큰 맥락에 닿아 있어서 일반 독자에게 읽힌 만한 논문 등 9가지 기준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역사학, 철학, 미학, 문학 등의 인문과학 분야와 정치학, 법학, 사회학, 경제학, 언론학 등의 사회과학 분야,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여성학과 환경, 과학기술학 등의 학제 간 연구 분야 등 20개 분과 23~25권의 책으로 출간한다는 기획이지만, 지금까지 『중국철학』(이승환·이동철 엮음), 『미학』(김진엽·하선규 엮음), 『서양사』(안병직·이영림·이영석 엮음), 『동양사 1』(임병덕·정철웅 엮음)만 출간한 상태로, 후속 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시리즈의 1권이 아직도 미완이란 점도 역설적이다. 학계-대중을 연결한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 출판사측은 먼저 ‘논문의 내용과 형식이 연구자 집단 너머로 확산되기에는 지나치게 어렵다는 태생적 한계와 독자들의 선입견’을 지적한다.

역시 벽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이어 이들은 “학문 분과 내에서, 또 학제 간에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문화가 부족한 탓에 1차 독자인 학자들마저 논문을 선별하는 기획 방식 자체에 회의적이거나 수록된 논문들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라고 조심스럽게 진단하고 있다. 비록 의도와는 달리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 시리즈는 ‘문제적’이다. 무엇보다 지식과 학문의 대중화를 꾀하되 쉽게 읽히고 쉽게 소비되는 방식이 아니라 종전까지 접할 수 없었던 수준 높은 학문적 논의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새로운 지식 대중화의 방식을 시도한 점, 나아가 독창적인 이론과 담론을 생산하지 못하고 해외의 최신 이론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했던 우리 학계의 현실에서 우리 사회·현실과의 접점을 담아낸 우리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제시하려 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책세상이 꼽은 ‘호응이 좋았던 책’은 『니체전집』(전 21권)이이다. 니체가 死去한 지 백 년이 되는 지난 2000년 8월 25일에 맞춰 시작된 『니체전집』은 이후 5년간의 여정을 거쳐 2005년 10월 21권으로 완간돼 지금까지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니체’와 ‘전집’이 말이다. 책세상이 이 전집을 구상하고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전집은 한 사상가의 사유의 전모를 총체적으로-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초자료라는 점에서, 특히 ‘정본’ 작업이 중요하다.

이것은 다시 학자들과 학계, 그리고 이들과 대중 간의 번역과 해석을 둘러싼 풍요로운 논의와 대화, 논쟁을 가능케 해 우리 학문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게 된다. 그러나 전집 특히 외국 전집을 가져오는 경우, 오해와 왜곡이 불씨처럼 살아있게 마련이다. 니체는 그런 ‘오해와 비난’(일례로 파시즘의 옹호자)을 아마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사상가일 것이다. 책세상은 이것을 의식, 오해되고 통속화된 니체를 건져내는 작업을 선택했다. 니체전집의 정본으로 공인된 독일 발터 데 그루이터(Walter de Gruyter) 사의 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KGW) 판본을 채택한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두 번째로 이 판본을 번역한 셈이다. KGW은 엄밀한 문헌학적 작업을 통해 니체의 글들을 어떠한 첨삭도 없이 원형 그대로 정리해 순차적으로 출간함으로써 오랫동안 지속된 遺稿 논쟁을 일단락 짓고 니체전집의 정본으로 공인받았다. 이 전집 번역의 미덕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본에서 들여온 용어 ‘초인’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원어 그대로 ‘위버멘쉬(‥Ubermensch)’로, ‘권력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로 번역했고, ‘영겁회귀/영원회귀’는 ‘영원회귀’로 통일했다. 니체 번역의 표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니체의 원 어감을 전달하는 데도 신경썼다. 국내 니체 연구 성과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하고 수준 높은 니체 해석들을 담은 각권 해설도 빼어나다. 전 21권 중 12권을 국내 초역한 이 전집은 국내 니체 수용 80여 년의 연구 성과를 결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세상 편집팀은 “‘망치를 든 철학자’, ‘파괴와 창조의 철학자’ 니체 철학의 매력과 가치, 그리고 니체에 대한 독자들의 선호, 저본이 된 KGW 판에 대한 신뢰”를 독자들의 예상밖 호응 요인으로 꼽고 있다. 이영희 부장은 “준비 기간까지 합치면 8년여 동안 지난한 작업이 이어졌다. 한권 한권 쌓이는 신중한 행보가 결과적으로는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의 관심을 유지시키면서 지속적으로 홍보 효과를 발휘하게 했다. 품격 있는 전집은 독자들의 소장 욕구도 자극했다”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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