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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보는 위치 또는 아시아로부터 국민제국으로 가는 길
제국을 보는 위치 또는 아시아로부터 국민제국으로 가는 길
  •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역사학
  • 승인 2012.09.0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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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 야마무로 신이치 쿄토대 교수와 『사상과제로서의 아시아, 그 이후』

 

▲ 서울대에서 강연하고 있는 야마무로 신이치 교수.
일본의 동아시아학 연구자인 야마무로 신이치(山室信一) 쿄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를 생각할 때면, 문득문득 ‘위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그의 연구를 대하면서 언제나, 우선은 그 거시적인 문제의식과 그를 뒷받침하는 박학함에 압도당해 왔다. 그러나 그 압도당한 마음 한켠에서는 늘 어떤 허전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번에 그의 강연록을 접하면서, 나는 그 마음 한켠의 허전함이 ‘위치’와 관련된 문제라는 점을 확인하게 됐다. 여기에서 ‘위치’란, 제국을 바라보는 ‘위치’ 혹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위치가 갖는 중요성 같은 것을 말한다. 야마무로 교수의 주저인 『사상과제로서의 아시아』 발간 10주년을 기념해, 2011년 서울대 일본학연구소에서는 ‘사상과제로서의 아시아, 그 이후’라는 이름의 강연회가 개최됐다. 올해 7월에는 같은 이름의 강연록이 단행본(제이앤씨)으로 출간됐는데, 이는 그 동안의 그의 고민과 작업의 주요 궤적을 아는 데 요긴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서울대 일본학연구소가 공들이고 있는 ‘리딩 재팬’ 시리즈 다섯 번째 책이기도 하다. 요약컨대, 최근 10년 동안의 야마무로 교수의 작업은 아시아라는 해간으로부터 ‘국민제국(론)’으로 옮아가고 있다. 『사상과제로서의 아시아』에서 야마무로 교수는 아시아라는 공간을 사상사의 영역으로 다루기 위해 필요한 과제를 제출하고 있다. 먼저 공간으로서의 아시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축ㆍ연쇄ㆍ투기의 삼위일체의 시각이 중요한데, 기축으로 공간을 확인하고, 연쇄에 의해 공존하는 것을 인식하고, 투기에 의해 새로운 아시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 가운데서 특히 방법론으로서의 ‘사상연쇄’의 시각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사상연쇄의 가운데에서 평준화, 유동화, 고유화라는 세 개의 방향성이 다른 벡터가 작용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국민국가 형성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공간·공존·투기라는 방법으로 아시아 읽기
동아시아 사상연쇄의 결과 곧 각기 방향성이 다른 벡터의 힘이 작용해 형성된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국민국가’라고 할 때, 그 논리의 연장선 상에서는 필경 국민국가와 근대제국이 동시병행적으로 형성된 시대로 근대를 파악해야 할 필요성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것이 국민제국론 혹은 ‘국민제국’이라는 작업가설이다. 저자 본인은 아직 겸손하게도 국민제국이 작업가설의 수준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국민제국론은 대단히 흥미로운 이론적 경지로 나아가고 있는 듯싶다. 근대의 국민제국은 전근대의 가산제국과는 달리 주권적 국민국가의 확장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국경을 갖고 있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정리된 저자의 국민제국론은 다섯 개의 테제로 구성돼 있는데, 그 가운데서 식민지와 관련을 가진 것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테제이다.

본국과 지배지역은 격차원리와 통합원리에 근거한 異法地域 결합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네 번째 테제이고, 국민제국 속의 피지배지역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다섯 번째 테제이다. 야마무로 교수는 국민제국이 이법지역 결합으로 존재한다는 넷째 테제를 국민제국에 저항하는 힘이 생성되는 주요한 근원으로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테제는 한나 아렌트가 이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강조한 바 있던, ‘국민국가의 딜레마’와 거의 유사한 문제의식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간으로서의 동아시아를 파악하기 위해 제출된 사상연쇄라는 시각이, 물론 단선적인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은 아닐 테지만, 국민제국론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 야마무로 교수의 ‘그 이후’ 10년의 사상 궤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연쇄’에 부재하는 것
여기에서 그 어떤 허전함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위치’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듯싶다. 저자가 제기하는 사상의 ‘연쇄’라는 시각은 ‘전파’ 혹은 ‘위로부터의’ 힘이 일방적으로 작용하는 바를 함의하는 바가 크다. 예컨대 연쇄의 내용을 이루는 것 가운데에도 고정화(혹은 고유화)라는 작용은 있지만, 역으로 식민지로부터 치고 올라가는 ‘아래부터의’ 작용 혹은 힘은 배제돼 있는 것이다. 연쇄라는 개념에는 제국과 식민지의 ‘상호작용’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만한 여지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국민제국론의 네 번째 테제 역시 제국으로부터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힘 혹은 제국과 식민지의 상호작용 같은 것은 거의 고려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주로 근대 제국의 본국에서 시작된 제국사 연구가, 그 거시적이고 전복적인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제국 중심의 일방향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마무로 교수의 국민제국론 역시 좀더 아래부터의 힘에 개방적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위치’(location)의 문제가 중시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던가.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역사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한국근대사, 동아시아사를 전공했다. 논문과 저서로는 「일제하 물산장려운동의 배경과 그 이념」, 『식민지 공공성, 실체와 은유의 거리』(공저), 『식민지의 회색지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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