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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어떻게 ‘텍스트의 제국’이 됐을까
중국은 어떻게 ‘텍스트의 제국’이 됐을까
  • 김월회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
  • 승인 2012.08.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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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⑩ 인문교육과 고전읽기가 만나다(동양편·최종회)

우리가 관습적으로 ‘글월 문’ 식으로 새기는 ‘文’ 자는 본래 무늬를 뜻한다. 요즘 부쩍 강조되는 인문학의 人文은 그러니까 ‘사람의 무늬’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사람의 무늬’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무늬는 겉으로 드러난 일정한 모양을 가리킨다. 주로 ‘명사형’으로 명명되고 정적인 것으로 인지된다. 그러나 무늬가 늘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다. 天文을 예로 들어보자. 보통 “천문을 본다”고 할 때 이는 단순히 별들이 자아내는 ‘하늘의 무늬’를 평면적으로 인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늘의 무늬를 통해 별들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미를 구성해내는 행위를 지시한다. 실상은 움직임을 보는 것임에도 표현은 멈춰서 있는 무늬를 본다고 했으니, 무늬를 평면적이고 정적인 양태에 움직임을 함축하고 있는 형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사람의 무늬’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람의 외형을 본뜬 무늬’가 아니라 ‘사람다움’을 표상하는 ‘靜中動’한 형상이다. 사람다움은 현장에선 움직임을 통해 드러나고 실현되기 때문이다. 하여, 사람의 무늬 곧 인문은 주로 ‘동사형’으로 표현되거나 설명된다. 공자는 사람다움의 요체인 仁의 정체를 묻는 제자들에게 “仁은 ‘人’과 ‘二’의 결합”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제어하는 근원적인 윤리덕목” 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기”,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기”와 같은 구체적인 행위를 적시했다. 고정적 실체라기보다는 ‘과정적 실체’인 사람다움이었기에 동사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사는 ‘고체적’이지 않고 ‘액체적’이기에 유동하는 실체의 표현에 적합했다.

공자, “고전 안보면 벽 두고 살게 될 것”

사람다움의 무늬가 주로 동사로 표현되고 설명된다는 것은 인문이 곧 힘(macht)임을 시사한다. 그것은 내가 사람다운 사람임을 나타내는 능력임을 의미한다. 직립보행이라는 형상을 갖추었다고 해서 사람인 것이 아니다. 예컨대 나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릇’[器]을 지시하기보다는 그것에 담기는 ‘물’을 지시한다. 인문을 체현하고 있어 삶 그 자체가 인문인 군자는, 공자가 “그릇이어서는 안 된다[君子不器]”고 했듯이, ‘不器’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규정된다. ‘不器’는 순간순간 구성되는 현실에 대처하는 ‘변이 능력’을 가리킨다. 주전자가 필요한 현장에서는 주전자가 되고, 술잔이 필요한 현장에서는 술잔이 되는 능력이 바로 ‘不器’의 본질이다. 마치 도마뱀[易]처럼 새로운 상황이 조성될 때마다 그 현장에 가장 ‘적합한’ 양태로 자신을 變容시키는 능력을 지닌 자가 곧 군자인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능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복수의 능력이 단일 형상으로 표현된 것이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매순간 조성되는 것이기에, 현장에선 늘 동적이다. 불합리한 제도나 폭압적인 질서도 그에게는 그다지 장애가 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그것을 자신의 능력을 신장하고, 자신을 한층 더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변이시키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니체의 말처럼, 그의 긍정하는 힘은 부정적인 것마저도 자신을 강화하는 데에 활용된다. 성난 군중에 포위된 공자가 “하늘이 문명을 포기하지 않을 터인데 저들이 날 어찌하겠느냐”며 도리어 강해졌듯이 말이다.

그렇게 ‘사람다운 자[仁者]’는 진정으로 유능한 자이다. 인자는 仁, 義, 禮를 통해 자신을 변이시킬 줄 아는 자이며, 자신의 능력으로 먼저 타인을 세우고 이루게 할 줄 아는 자이다. 그는 마냥 너그럽기만 한 자가 아니다. 오직 인자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다는 공자의 말처럼, 그는 ‘엄격한 자’로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자신의 뜻을 지키고 실현하는 능력을 지닌 자이다. 인문은 이렇게 어진 자가 되는 과정을 지시하는 ‘살아 움직이는’ 무늬이다. 능력의 신장을 통해 자신을 변이시키고 현실을 꾸준히 조성해가는 능동성의 동적 표현이다.

“305편의「시」를 외운다고 해서 내정을 맡겼더니 모자라고, 외국으로 파견했더니 일처리를 제대로 못했다. 많이 외운들 무엇하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 논어」

훗날 경전의 반열에 오른「시」는「서」,「 역」과 함께 공자시대의 대표적인 고전이었다. 거기에는 앞선 시기의 인문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공자는 이를 ‘동사적’으로 읽었다. 한 수의 시를 익힌다 함은 그 뜻을 이해하고 구절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의 현장에서 시의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 단지 한 편의 시라 할지라도, 그것을 익히기 전과 익힌 후의 능력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시」를 읽으면 “자신을 진작시킬[興]”줄 알아야 하고, “정치의 잘잘못을 볼[觀]”줄 알아야 하며, “더불어 선하게 어울릴[群]”줄 알아야 하고, “공적 분노를 발할[怨]”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고전을 공부하지 않으면 더불어 말을 할 수 없게 되며, 벽을 마주하고 선듯한 삶을 살게 된다고 경고했다. 고전을 지식 전수의 요체로만 보지 않고, 사람다운 삶의 영위를 가능케 하는 능력 신장, 자기 증강의 터전으로 삼았음이니, 사람다움의 무늬는 그렇게 고전과 만나 동적으로 개화할 수 있었다.

삶과 문명의 깊은 속살

‘G20’이라는 문구가 종종 운위된다. 정치적인 때가 묻었다고 해서 폐기하기엔 다소 아까운 표현이다. 선진국의 문턱에 다다랐다고 해 뿌듯해졌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더는 인문교육과 고전읽기를 외면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그 문구가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정신적, 물질적 차원 모두에서 수월성을 지속적으로 구현하고,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인문을 창출하는 상태를 일러 ‘선진국다움’이라 한다면, 이는 타자를 벤치마킹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선진국의 역사와 현 상태가 웅변해주듯이, 한 국가가 자력으로 국제적인 보편성과 경쟁력을 갖춘 인문을 창달했을 때 비로소 구현될 수 있다. 그래야 새로운 ‘벤치를 만들어내는[bench-making]’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새로운 ‘벤치’를 만들어가는 것은 고스란히 미래를 조성해 가는 행위가 된다. ‘G20’은 열심히 쫓아가서 잘 모방하면 그것이 곧 미래가 되는 단계에서 벗어났음을 말해준다. 지난 시절 선진국이 개도국의 미래가 되었듯이, 선진국다움을 실현한다는 것은 곧 미래를 기획하고 실현하는 행위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토대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머리로는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을 빌미 삼아 외면해왔던 인문교육의 강화가 그것이다. 대학에서만 그렇게 하자는 뜻이 아니다. 인문은 단지 고등학문의 바탕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삶을 구현하는 데의 바탕이기도 하다. 따라서 ‘삶으로서의 인문교육’이어야 한다. 초등교육과정부터 평생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사람다움의 무늬가 누구에게나 삶의 자산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인문적 시민사회’가 구현될 때 비로소 우리가 창출하는 미래는 지구촌의 공동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인문을 익힌다는 것은, 그 고갱이인 고전을 읽는다 함은 그저 박제가 된 과거와의 텁텁한 조우가 아니다. 그 실상은 문면과 행간에 삼투된 ‘오래된 미래’와의 역동적인 접속이다. 인문교육은 그래서 ‘미래 回想’이다. 2000여 년을 지속한 ‘중화제국’의 본령이 바로 ‘텍스트의 제국’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월회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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