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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수상] 칸트와 서정시인
[독서수상] 칸트와 서정시인
  • 교수신문
  • 승인 2000.1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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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19 11:27:56
김상봉/서평위원·철학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의 시를 보며 혼자 묻는다. 언제부터 우리의 시인들은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일까? 우리가 만해나 소월을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의 시에서 그들 개인의 일상적 삶의 흔적을 읽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기 개인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시에서 나타나는 시적인 주체는 개인으로서의 시인 자신이 아니라 시인의 자기의식 속에서 표현되고 실현되는 어떤 보편적인 주체성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시인들은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시가 점점 더 사사로운 넋두리가 되기 시작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표지를 넘기면 우리는 첫 장에서 칸트가 베이컨 책의 한 구절을 길게 인용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De nobis ipsis silemus―우리들 자신에 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려 한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라면 침묵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순수이성비판'은 주체의 자기반성을 위한 책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칸트는 나 자신을 분석하는 책의 첫머리에 나 자신에 대해서라면 침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역설인가? 아마도 그것은, 내가 오직 사사로운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만 참된 나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서정시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그리스에서 서정시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개인적 주체성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호메로스는 그의 서사시에서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정시인 사포는 자기 자신이 내밀하게 느끼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서정시인이 노래했던 자기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주체의 외관을 띠고 나타나지만, 사실은 그런 개별적 주체 속에서 표현되고 실현되는 보편적 주체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의 위험은 바로 그 외관에 있다. 참된 자기반성과 감상적 자기연민·자기도취가 모두 구별 없이 주체성의 형식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주체의 죽음'이 유행어가 되어버린 우리시대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반성적 물음은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참된 반성은 드문 시대에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 그렇게 집요하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일까? 그것도 시인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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