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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조씨의 고추장에 흠뻑 빠진 영조, 食을 貪하다
순창 조씨의 고추장에 흠뻑 빠진 영조, 食을 貪하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7.16 1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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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궁중음식고문헌 심포지엄_ 인문학자가 차린 조선왕실의 식탁

▲ 영조 어진.

“당신이 먹는 음식을 내게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이『미각의 생리학』(1825)에서 한 말이다. 송이, 생전복, 새끼 꿩, 임자수잡탕, 연계증, 누름적, 임자꿀찰시루편, 귤병… 이 음식들을 먹은 사람은 누구일까.

지난 11일,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에서는 ‘인문학자가 차린 조선왕실의 식탁’ 심포지엄이 열렸다. 고문헌을 통해 ‘조선의 왕들은 무엇을 먹었을까’라는 호기심이 이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한식재단에서 지원한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조선왕조 궁중음식 고문헌 아카이브 구축’이다. 고문헌을 통해 ‘수라상’을 복원하려 한 인문학자들의 참신한 시도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 중에서도 정병설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는 「수라의 진어 과정과 영조의 일상 식사-『승정원 일기』를 중심으로」에서 문헌에 나타난 영조의 고추장 사랑을 밝혔다. 연구책임자 주영하 한중연 교수(문화예술학)는 「음식발기에 기재된 ‘요리소 화부인’의 정체」를 통해 음식 뒤에 숨겨진 조선왕조의 외교권력 암투를 소개했다. 단순한 고문헌의 복기보다는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조선왕실의 식탁을 복원해내는 노력이 돋보였던 학회였다.

현재 전승되는 궁중 음식은 주로 조선의 마지막 상궁들에게서 요리법을 전수받은 황혜성 선생을 비롯한 몇몇 궁중 음식 연구자들의 노력을 통해 알려졌다. 하지만, 상궁 몇 명에게 들은 것만으로 조선 궁중 음식의 전모를 알기 어렵다. 그래서 대개의 연구는 의궤류의 자료에 의존한다. 197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찾았던 『園行乙卯整理儀軌』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된 음식은 특별한 날을 위한 상차림이다. 일상적인 음식문화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정병설 교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승정원 일기』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임금과 신하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기록된 『승정원 일기』에서 왕의 ‘건강’은 단골 소재였다. 건강은 음식이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정 교수는 내의원 의관과 왕의 문답에서 궁중 음식 문화의 일상 정보를 엿볼 수 있음을 언급하며 조선 최장기 통치자(53년), 영조의 식성을 밝혀낸다.

『승정원 일기』 궁중 일상음식 기록해

조선왕조에서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왕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역모의 혐의로 몰려 사형당하기 일쑤였다. 영조 역시 이복형인 경종이 세자로 정해져 있었기에 일개 왕자로 살 운명이었다. 정 교수는 왕위에 오르기 전 이십대 초에 그려진 영조의 초상에서 보이는 비쩍 마른 몸, 날카로운 인상을 그의 식습관과 연결 짓는다. 그는 『승정원 일기』에서, 영조가 타락죽(미음과 우유를 섞은 음식, 소화 쉽고 단백질 섭취에 좋다)을 좋아하고 기름진 음식을 꺼렸다는 기록을 들춰내며, 간간한 조기 반찬에 보리밥을 물에 말아먹는 식습관을 환기시켰다.

식욕이 떨어진 영조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고추장’이었다. 원래 임금의 음식은 사옹원에서 올리지만 고추장은 내의원에서 맡았다. 정 교수는 입맛을 돋우는 장이 약과 같이 취급됐기에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승정원 일기』에서 영조가 좋아했던 고추장이 궁중의 것이 아닌 궁 밖의 순창 조씨, 조종부 집에서 담근 고추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정 교수는 영조가 사랑했던 순창 조씨의 고추장이 오늘날 순창 고추장의 기원인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연구책임자 주영하 교수는 고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요리소 화부인가 보이’라는 내용에 주목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리소 화부인은 앙트와테느 손탁(1854~1925)을 가리킨다. 손탁은 원래 프랑스인으로 여동생이 러시아인과 결혼하면서 초대 조선 러시아공사인 베베르를 알게 된다. 31세의 젊은 나이, 외모, 음식솜씨를 갖춘 손탁은 베베르의 추천으로 고종을 알현하고 신임을 얻어, 건천궁을 서양식으로 장식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커피로 고종 독살시도, 손탁에 대한 도전

 주 교수는 『고종실록』에서 고종이 1895년 탄신일 기념 연회에 각국 공사·영사를 접견하고 음식을 내렸

▲ 1902년 독일여성 손탁이 지금의 서울시 중구 정동에 세운 서양식 호텔(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고, 손탁이 이 연회를 주도했음을 언급한다. 성공적인 연회에 대한 하사품으로 고종은 손탁에게 덕수궁 궁전의 일부 땅을 하사했다. 손탁은 조선식 집을 서양식으로 바꾸고 프랑스 요리를 고종에게 올리며 서양인들에게도 그 음식을 제공했다. 1894년 결성된 정동구락부는 손탁의 사저를 모임장소로 사용했다. 주 교수는 결국 고종이나 왕실과 접촉하려는 외국인들이 음식을 통해 먼저 손탁과 연결돼야 했음을 지적했다.

손탁의 엄청난 권력에 대한 반발은 역시 음식의 하나인 ‘커피’로 고종을 독살하려는 움직임으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주 교수는 이 사건을 아관파천 이후 더욱 강력해진 고종의 전속 조리사 손탁에 대한 일종의 도전으로 본다. 1902년 독일여성 손탁이 지금의 서울시 중구 정동에 세운 서양식 호텔(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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