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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콘과 연구실
에어콘과 연구실
  • 이기홍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2.07.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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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해를 거듭할수록 나의 사람 됨됨이가 허약해지는 것 같다. 삼보 이상 이동시에는 으례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도 그렇고 계단을 보면 승강기 입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것도 그렇다. 특히 요즈음에는 등에 땀방울이라도 맺힐 짝이면 시원함을 찾아서 공조기가 설치된 방을 드나든다. 수업도 공조기가 있는 강의실만을 고집해서 학과의 조교가 조정에 애를 먹는다. 참, 내 허약함의 대표적인 징표는 무시로 조교를 불러 문제를 해결하는 일일 것이다.

하기야 꼭 나만 그런 것도 아닌 듯 싶다. 내 연구실이 있는 건물의 벽을 보면 40여개의 방가운데 공조기 배관이 없는 방은 10여개에 지나지 않는다. 동료 교수의 쾌적한 방을 나설 때에는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도대체 내 방의 고물 선풍기는 왜 스위치조차 뻑뻑한 것이며, 틀어놓으면 금방 더운 바람을 쏟아내는 것인가. 머리까지 멍한 더위에 옷을 활활 벗고 있으면서 여학생이라도 찾아오면 어쩌나 하고 조바심한 적은 한두번이던가. 열어놓은 문으로 들려오는 이웃 방의 전화 대화에 눈치없이 웃음이 나와 겸연쩍어 한 적은 또 한두번이던가. 당장은 경제가 어려워서 그렇지 사정이 좋아지기만 한다면 내 방에도 공조기를 놓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뉴스에서는 벌써 순간 전력사용량이 최고치를 경신했다느니 하면서 에너지 과다사용과 산업활동의 지장을 우려하지만, 또 대학본부에서는 공공요금 때문에 재정에 압박이 심각하다고 틈만 나면 엄살을 부리지만, 도대체 국가나 대학본부라는 것이 바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무더위와 씨름하며 짜증스럽게 시간을 허비하느니, 약간의 투자로 쾌적한 환경을 마련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내 자신은 물론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이나 국가에도 훨씬 더 이익이 될 것이다. 또 누가 아는가, 공조기의 도움으로 느닷없이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결과라도 생산해 낼는지.

그런데 꼭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교수라는 인간은 독방에 앉아 있는 죄수와 유사하다고 언젠가 내 스승 가운데 한 분이 내게 일러준 적이 있다. 자기 연구실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그 누구와의 交遊도 거부하는 유아독존의 존재,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지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에 손방인 고독한 존재. 결국 교수란 스스로 독방에 갇히기를 선택한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그 스승은 일갈하였다. 서늘한 기운이 빠져나갈까 꼭꼭 닫힌 방문들을 지나칠 때면 자꾸 그 생각이 나는 것이다.

이기홍`/`편집기획위원·강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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