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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즐거움을 가르친 플루타르코스의 혜안
책읽기의 즐거움을 가르친 플루타르코스의 혜안
  • 안재원 서울대 HK연구교수
  • 승인 2012.07.16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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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⑨ 이렇게 읽고 이렇게 이해한다(서양편)

플라톤은 자신이 기획한 ‘좋은 나라’에서 시인을 추방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추방론을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국가』 제3권의 시작 대목이다.

“장차 신을 경배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서로간의 우정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도모해야 할 사람이 신에 대해서 어릴 적부터 들어야 할 이야기와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는 다음과 같네.” 『국가』 제3권 386a

단적으로, 플라톤은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는 장면을 꼽는다. 먼저 『일리아스』의 해당 장면이다.

“헤라를 보는 순간 제우스의 현명한 마음을 애욕이 사로잡았다. 둘이서 부모님 몰래 잠자리로 가서 처음으로 사랑의 동침을 하던 그 때처럼. (…) 헤라에게 구름을 모으는 제우스가 이렇게 답했다. ‘헤라여! 신들이나 인간들 중 누가 볼까 두려워마시오.’ (…) 이렇게 말하고 크로노스의 아들은 아내를 품에 안았다.”  『일리아스』제14권 299~346행

요즘 같으면, 19禁 등급을 맞고서 안개처리 됐을 장면이다. 바로 이 장면에 대한 플라톤의 해석이다.

“제우스를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이, 즉 다른 모든 신과 인간이 잠자고 있는데, 제우스만 홀로 깨어나서 온갖 궁리를 하더니, 이 모든 궁리를 욕정 때문에 곧장 망각해버리고, 헤라를 보자마자 정신줄을 놓고서는 침실로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헤라와 땅바닥에서 뒹굴며 성교를 나누고 싶은 욕정에 사로잡혀다는 표현은, 물론 사랑하는 부모 몰래 젊은 연인이 서로를 처음으로 침실에서 껴안았고 뒹굴었을 때에도 그렇게는 하지 못했을 정도의 욕정에 사로잡혔다는 표현은 적합한 묘사는 아닐 것이네.” 『국가』 제3권 290 b-c    

성인용으로 지어졌던 『일리아스』

사정이 이와 같다면, 플라톤의 비판이 그리 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읽히기는 곤란하기에. 이것이 플라톤이 시인에게 혹독한 결정을 내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아이들의 교육에 사용됐던 ‘주 교재’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였다. 여기에서 잠깐!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는 원래 아이의 교육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원래는 성인용 이야기였다. 이런 까닭에, 호메로스는 아이들의 교육에 부적절한 내용도 많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호메로스가 아이들의 교육에 적합한 텍스트는 아니었다.

아이들의 교육에는 차라리 아이소포스의 우화가 더 적합한데,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가 그의 우화를 운문으로 고쳐 부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닌 셈이다(『파이돈』 60-c-d). 어쨌든, 플라톤에게 교육은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그였기에, 흡수력이 높은 아이들이 호메로스를 그냥 듣고 즐기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흉내내며 따라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성토다.

“자유인은,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것들, 즉 용기와 절제와 경건과 자유인다움을, 이 모든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하네. 반면 그 어떤 창피한 짓도 모방하지 말아야 하며, 이런 걸 모방함에 능숙한 사람이 돼서도 안 되네. 이는 모방으로 인해 이들이 그런 사람이 돼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일세. 행여 자네는 모방이 젊은 시절부터 오래도록 지속되면, 몸가짐이나 목소리 혹은 사고방식에서도 마침내는 습관으로, 나아가 성향으로 굳어져 버린다는 사실을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국가』 제3권 395 c-d

이상이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에 대한 소략이다. 물론, 플라톤의 시인추방론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얼핏 보면, 플라톤이 시인들 혹은 문학을 ‘좋은 나라’의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철인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물론 철학적으로는 좀 더 따져 보아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실제 인류 역사가 플라톤의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은 문학 비평의 효시가 됐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어떤 책을 읽혀야 하는지’ 즉 고전 선정의 준거 기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문학에 대한 플라톤의 강경 노선은 공이 과보다는 더 크다 하겠다. 따라서 플라톤의 강경 노선에 대해서 인정해야 할 점은 인정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다른 데서 노출된다. 이에 대한 플루타르코스의 말이다.

“사정은 철학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순수한 호의를 가지고 열성적인 태도로 철학을 듣고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실상은 이런 의도와는 무관하게 철학과는 무관하고 심지어는 아주 시시한 이야기들에서 더 큰 즐거움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시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부연하자면, 아이들 혹은 젊은이들이 본성적으로 혹은 기질적으로 시가와 문학이 주는 즐거움에 빠진다는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즐거움이 근본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즐거움이 철학 공부에 도움 된다고 한다. 다시 플루타르코스의 말이다.

“영혼에 대한 철학의 이론들이 신화적인 이야기와 결합해서 논의될 때, 젊은이들은 즐거움을 통해 철학에의 열망에 휩싸인다.” 『젊은이는 시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책읽기의 안전장치는…

인용에 따르면, 어떤 노래를 들어야 할지, 다시 말해서 어떤 책을 읽혀야 할지에 대한 플라톤의 고민은 이렇게 해서 그리 심각한 물음이 아니게 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어떤 것을 읽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제공하는 선정적인 장면에 담긴 쾌락은 위험하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작품 자체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플루타르코스의 항변이다. 하지만 플라타르코스도 철학자였다. 즐거움을 그 자체로 인정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분별과 절제’라는 안전장치를 제시한다. 그의 주장이다.

“젊은이들은 먹고 마시는 즐거움에서 절제를 유지해야 하는 것에 못지않게, 강의를 듣고 책을 읽는 과정에서도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유익함과 안전함을 추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마치 산해진미의 잔칫상에서 절제를 가지고 즐기듯이 말이다.” 『젊은이는 시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한마디로 책읽기의 즐거움을 누리지만 빠지지는 말고 거리를 두며 읽으라는 주문이다. 저자 혹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형성되는 순간인 셈이다. 이쯤 되면 책읽기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책의 즐거움이 주는 유혹에 견디어야 하기에. 이런 의미에서 독자는 마치 세이렌의 유혹에 저항하는 오뒷세우스일 것이다. 잘 읽지 않아서 그렇지 제대로 읽으면, 사실 책읽기의 즐거움만큼 영혼을 유혹하는 세이렌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플루타르코스는 책읽기에도 안전장치(to soterion)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는 물 위를 걸으면서 빠지지는 말라는 것과 같은 소리다. 사실,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실천하는 방안도 함께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방안을 담은 책이 바로 『젊은이는 시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다.

책은 글 여행을 하는 중에 접하는 수많은 유혹들을 담고 있다. 또한 이것들을 극복하는 방안들도 소개한다. 예컨대 우화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가 그 한 사례일 텐데, 결론적으로 텍스트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버티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관건이라 한다. 한마디로, ‘빠지지 말고 즐기시오’라는 소리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플라톤의 자유인과 플루타르코스의 자유인이 대별될 것이다.

이른바 타락으로 이끄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 전자의 입장이라면, 타락으로 이끄는 것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후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책읽기의 실제에서는 후자가 훨씬 더 어려웠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어려움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문학 비평이 탄생하게 된 것은!

안재원 서울대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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