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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하듯 내리치는 채찍질
조롱하듯 내리치는 채찍질
  • 교수신문
  • 승인 2012.07.1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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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질과 그의 풍자화

     

 

▲ 앙드레 질, 「식인귀 저널리즘」, 31호, 1866년 10월 7일.권력과 풍자-19세기 파리의 풍자화가 5인전 -한길책박물관 개관기념 기획전-일시: 2012.6.9~9.30 -장소: 한길책박물관

 

한길사(대표 김언호)가 파주출판단지에 한길책박물관을 마련했다. 개관식은 지난달 9일 오후에 조촐하게 열렸다. 개관 기념 기획전이 눈길을 끈다. ‘권력과 풍자-19세기 파리의 풍자화가 5인전’이다. 풍자의 백미는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하는 권력에 대한 풍자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격동기 프랑스 파리의 풍자화가들은 당시 신생하는 자본가, 언론, 정치권력 등을 겨냥해 성역 없는 대포를 쏴댔다.

기획전에는 앙드레 질, 장-루이 포랭, 아돌프 윌레트, 카랑 다슈, 테오필-알렉상드르 스타인렌이 초대됐다. 한길사는 이 기획전을 『권력과 풍자』(글 류재화)라는 도록에 담아냈다. 류재화씨는 이들 5인을 가리켜 “모두 도미에의 후배들로, 시대적 정황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정치 성향이 다 같지는 않았다”라고 설명한다. 도록 『권력과 풍자』에 수록된 풍자화가 앙드레 질(그림) 관련 부분을 발췌해본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조르주 쿠르틀린은 “위고가 한 세기 전체였다면, 질은 자기 혼자 한 시대 전체였다”라고 말했다. 시인 질 주이는 “홰에 꼿꼿이 서 있는 수탉처럼 강하고, 송곳니 같은 콧수염을 휘날리며, 황금같은 강검 크레용을 난폭하게 휘두르는 자”라고 노래했다. “앙드레 질은 기묘한 사람이었다.

앙드레 질은 파리의 정신이었고, 파리의 희생자였다. 그의 뇌를 짓누른 것은 파리 생활 그 자체였다.” 1860~70년, 적어도 이 10년 동안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앙드레 질의 부음 기사 첫 대목이다. 샤랑통 정신병원에 수감된 지 4년 만인 1885년 봄 그는 세상을 떠난다.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얼마 전 그는 물랭 루주의 풍차를 가리키며 “저기서 밀을 찧어 가루로 만든다”라고 말하더니 이어 파리 시내를 가리키며 “저기선 뇌를 찧어 미친 사람을 만든다”라고 말했다.

파리 정국의 묘사가, 파리 유명인사들의 초상화가, 파리 정신의 매개자였던 그가 파리를 못견뎌 정신질환을 앓고 그 때문에 사망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고 계시적이다. 1881년 그가 정신병원에 감금됐다는 소식은 파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제2 제정기 권력에 맞선 시사화가 앙드레 질은 1840년 10월 17일 파리에서 태어나 1885년 5월 1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앙드레 질’은 필명으로, 본명은 루이-알렉상드르 고세 드 귄(Louis-Alexandre Gosset de Gul쨨nes)이다. 앙드레 질이 주로 활동한 시기는 제2제정 말기부터 제3공화정 초(1860~80)로, 이 시기는 ‘작은 신문’(Petite Presse) 혹은 ‘재미난 신문’(journal amusant)이라 불린 풍자삽화 신문이 우후죽순 쏟아지며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다.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고, 이미지와 텍스트를 함께 찍어낼 수 있는 인쇄기술이 발전한 덕이기도 하다. 앙드레 질은 사진작가 나다르의 소개로 1859년 샤를 필리퐁의 <재미난 신문(Le journal amusant)>에 처음으로 데생을 발표한다. 이어 프랑수아 폴로가 경영하는 <달(La Lune)>의 제25호부터 1면 그림을 단독으로 맡아 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 내용보다 앙드레 질의 1면 그림이 더 화제가 됐을 만큼 앙드레 질은 <달>의 얼굴이 된다. 나폴레옹 3세의 제정 반대를 공공연히 표방한 <달>은 숱한 검열에 시달리다 결국 1868년 1월 폐간된다. 그러나 달은 반드시 이지러지는 법이라는 믿음을 갖고, 검열을 조롱하듯 다시 <몰락(L’eclipse)>을 창간한다. <달>시기와 동일한 형식으로 <몰락>에서도 앙드레 질의 기념비적인 풍자초상화는 계속되며, 이 신문은 1876년 6월 400호를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빅토르 위고·찰스 디킨스 등 초상화도 그려 검열로 중단된 몇몇 해들을 제외하곤 앙드레 질은 20여 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파리의 내로라하는 유명인사들의 풍자초상화를 그렸다. 정치, 문화, 예술계 인사들, 소설, 연극, 오페라의 주인공 등 파리의 모든 유명한 이들이 총망라됐다. 레옹 강베타, 장 라스파이,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조르주 비제, 찰스 디킨스, 쥘 베른, 아돌프 티에르 등 앙드레 질이 그린 풍자초상화는 프랑스인들의 머리에 생생히 각인돼 있다.

가느다란 몸과 커다란 머리, 거기에 여러 비유와 우의가 실린, 일종의 표장 역할을 하는 각종 액세서리와 소품들. 그의 이런 방식은 풍자초상화의 전형적인 도식이 되기도 했다. 앙드레 질의 풍자초상화는 독소를 품고 있긴 하지만 보는 사람을 단번에 무장해제 시키는 웃음을 담고 있다. 잔인한 듯, 그러나 철저히 잔인하지는 못하다. 그의 스승이었던 쿠르베는 제자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질이 그린 양반들은 옷을 더 벗겨야 한다. 너무 아카데믹하다.” 그의 크로키는 형태를 부풀리고, 옷 속 근육을 비논리적으로 진행시키면서 그 차이 속에서 인물의 독특한 투를 만들어낸다.

풍자화는 으레 표현형식과 태도는 가벼우나 그 정신은 무겁고 심각하다. 시사적 사안의 무게와 그래픽 처리의 가벼움이 서로 반목하듯 경쟁하며 조합되는 지점에서 풍자화의 기능이 완성된다. 앙드레 질의 그림은 허장성세와 거만함 속에서 놀라운 설득력을 얻는다. 그 허장성세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적당히 체념한 자기희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냉소로 지치고 기력 없는 와중에도 경멸하듯, 조롱하듯 내리치는 채찍질과 같다. 풍자란 내용은 무거우나 형식은 가벼운 이율배반적 조합으로 탄생한다. 그것은 일부러 의도한 ‘태도’(attitude)이며, 위기를 전조하는‘방식’(manie?re)이다. 앙드레 질이 찾은 날카롭고 난폭한 선, 강렬한 대조색은 시대의 무기력과 질식을 휘젓기 위한 강한 산성의 진통제였다. 제정과 왕정이 부활하는 역행의 시대, 그에 대한 응수는 진지함이 아니라, 경박함과 조잡함을 동반한 보헤미안적 유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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