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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시인, 한국어를 국제적 문학어로 격상시켰다
‘가난한’ 시인, 한국어를 국제적 문학어로 격상시켰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7.10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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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_ 백석의 숨겨진 모습 조명

문인과 학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한 한국시인은 누구일까. 정지용 278편, 서정주278편, 김수영 266편, 대표적 국민시인이라고 알려진 김소월은 186편이다. 현재까지 제출된 백석 관련 학위논문은 놀랍게도 320편이 넘는다. 더욱 중요한 대목은 2000년 중반 이후, 매년 스무 편에 가까운 백석 관련 논문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길상사에 얽힌 자야와의 사랑이야기, 토착어가 시인의 감성과 조응할 때 느껴지는 백석 시만의 개성은 이미
영생고보 영어교사 재식 당시의 백석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지난달 30일 한국비평문학회·대산문화재단·한국작가회의가 공동주최한 ‘백석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는 서정시인 백석, 북한 체제에 순응한 백석에 관한 논문보다 흥미로운 주제들이 발표됐다. 주인공은 백석 시에서 자주 사용되는 형용사를 분석한 논문(「‘가난한 나’의 무섭고 쓸쓸하고 서러운, 그리고 좋은」, 고형진 고려대)과 번역가로 살아온 백석의 모습(「백석번역문학의 높은 수준-고요한 돈강을 중심으로」, 방민호 서울대)을 밝힌 논문이다.

최동호 고려대 교수(국어국문학, 한국비평문학회장)는 기조강연「백석 시의 전체성에 대하여」발표를 통해 지금까지 이뤄져온 백석 연구의 한계점을 짚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최 교수는 현재까지의 백석 연구는 1936년 간행된 시집『사슴』에 국한시켜 전개되거나 광복 직후까지의 작품에 대해 제한적으로 연구한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추가 발굴된 백석의 시·자료는 지난해, 1997년 초판 간행된 김재용의『백석전집』에 보완돼 실렸지만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현재 출간기록은 있지만 발굴되지 않은 번역소설『테스』,『노르웨이 언덕에서』등을 볼 때, 분단의 장애를 넘어야 온전한 백석 연구가 가능하다고 제안했다.

감정형용사에 주목 ‘가난하다’ 의미 밝혀

고형진 고려대 교수(국어교육과)는 기존의 백석 시어 연구를 탈피해, 백석 시에 구사된 고빈도 감정 형용사 어휘에 주목했다. 형용사는 보다 높은 기교의 구사를 통해 시적 함축이나 운율 형성에 기여하는 ‘에피세트’라는 시적수사를 담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 교수는 백석이 가장 많이 사용한 형용사로 ‘무섭다’, ‘외롭다·쓸쓸하다’, ‘서럽다·슬프다’, ‘좋다’, ‘가난하다’를 꼽는다. ‘가난하다’는 말이 사전적 의미로는 경제형편을 나타내지만, 백석의 시에서는 어떤 정신이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는 백석 시의고빈도 형용사는 거의 ‘감정형용사’에 집중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수라」,「황일」등의 시에서 고 교수는 유년 시절의 특정 장소와 소리에 얽힌 무서움의 이미지를 포착해낸다. 그리고 이 이미지가 바로 순진무구했던 동심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서정의 정서라고 말한다.

‘무섭다’는 감정이 유년화자에서 성년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정서라면, ‘외롭다·쓸쓸하다’는 성년화자의 감정표현이다. 고 교수는「허준」과「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통해 “이 세상이 싸움과 흥정으로 왁자지껄하는 곳”이어서 이 세상 나들이가 ‘쓸쓸함’을 밝혀낸다. 그는 이 ‘쓸쓸함’을‘서러움’으로 확장시킨다. 반면에 ‘좋다’는 나머지 감정형용사와 대척점에 서 있다. 이는 화자의피동적인 입장을 벗어나는 형용사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 ‘좋음’의 대상은 대부분 자연(동식물과 음식)이다.

고 교수는 ‘무섭다’에서 시작해 외롭고 쓸쓸하고 슬프며 좋은 감정으로 연쇄된 백석시의 정신세계를 ‘가난하다’는 말로 모두 수렴시킨다. 재산이 없다는 것은 탐욕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쓸쓸한 나들이를 하는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가 백석 시의 ‘가난한’사람이다. 백석의 시에서‘가난한 사람’은 자신,  가족, 동무들뿐이다. 감정 형용사의 유기적 결합과 연쇄반응이 주는 감동은 오늘날의 혼탁한 세상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고 교수는 말한다.

백석에게서 토속어의 아름다움을 살린 서정시인의 모습을 벗겨내고 번역가의 면모를 부각시킨 이는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였다. 방 교수는 백석이 1948년「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끝으로 남한에서의 창작활동을 마감하고, 1956년「까치와 물까치」를 발표할 때까지의 문학적 공백기간을 복권해냈다.

그는 백석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미하일 숄로호프의『고요한 돈』8부 중 5부를 2년 만에 번역해 낸 것에 주목했다. 백석이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할 당시 제자인 김희모 씨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의 러시아어 실력은 출중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 교수는 일본에서 1935년부터 1950년까지 4차례에 걸쳐『고요한 돈』번역본이 출간된 점을 환기하며 백석이 이 번역본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8년에 걸친 문학적 공백, 번역가로 복권해

그렇지만 방 교수는 백석이 번역 출간한『고요한 돈』에서 간결한 문장과 적실한 순우리말을 사용함으로

노년기의 백석 (북한인민증사진)
써 문학어로서의 한국어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번역된『고요한 돈』을 읽으면 이국적인 곳의 과거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부터 우리말 소설이었던 것 같은 감각적인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지금의 사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순우리말 어휘들이나 섬세한 형용 표현들 덕분이라고 방 교수는 분석했다.

 

그러나 방 교수가 단지 언어적인 이유만으로 백석이 번역한『고요한 돈』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조선일보 사직 후 두 달 간 평안도 지역을 여행한 후 만주로 이주한 이후의 행적을 따라간다. 만주국 정무원 취직과 사임, 안동 세관 근무, 결혼과 이혼의 반복, 1944년 징용을 피해 광산에서의 노동… 방 교수는 1940년에 쓴「북방에서-정현웅에게」를 근거로 제시하며 방랑하던 시인 백석은 만주에서의 삶에서 자기 삶의 원형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해방 후 백석이 월남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주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는 “까자크 세계와 백석의‘북방’을 직접 연결짓는 것은 무리지만, 대륙적 시공간이자 삶의 시원, 생명의 본원적인 약동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라고『고요한 돈』의 번역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학술대회에는「백석의 시적 지향과 표현방법」(이숭원 서울여대), 「백석 문학의 연구 지형과 문학사의 균열을 보는 시각」(김문주 영남대), 「백석의 동화시」(박명옥 방송통신대), 「백석의 동시 논쟁」(장정희 서울예대), 「근대를 향한 백석의 직관과 의식」(최정례 한예종),「백석시와 북한시」(이상숙 가천대), 「백석 시의 북방의식 연구」(곽효환 경기대)가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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