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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 거르면서도 연구에 골몰 … 중국 젊은이들에게 ‘불굴의 의지’ 선사한 수학자
끼니 거르면서도 연구에 골몰 … 중국 젊은이들에게 ‘불굴의 의지’ 선사한 수학자
  • 양재현 인하대·수학통계학부
  • 승인 2012.07.09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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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야기 ③ 골드바흐 추측과 첸징룬

1742년 6월 7일, 프러시아 수학자 골드바흐(Christian Goldbach, 1690~1764)는 “5 보다 큰 자연수는 세 개의 소수들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라고 추측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스위스 수학자 오일러에게 보냈다. 소수는 약수가 1과 자신 밖에 없는 1보다 큰 자연수이다. 예를 들면, 2, 3, 5, 7, 11, 13, 17과 79는 소수이다. 오일러는 이 편지를 받은 후 이 문제에 흥미를 가지며 ‘2 보다 큰 짝수는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이것이 소위 ‘골드바흐 추측’이다. 가령 14=3+11=7+7, 32=13+19, 102=13+89 등이다. 2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추측은 풀리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에 젊은 중국 수학자 첸징룬(陳景潤, 1933~1996)이 독한 마음을 먹고 골드바흐 추측을 풀려고 여러 해 동안 시도했다. 불행하게도 이 문제를 풀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충분히 큰 모든 짝수는 한 소수와 두 소수의 곱과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라는 사실을 체(sieve)방법을 사용해 증명했다. 다음과 같다.

 
이것을 ‘첸의 정리(Chen’s Theorem)’라고 부른다.

‘첸의 정리’로 일약 스타덤 올라

첸징룬은 1933년 5월 22일 푸젠성 푸조우에서 우체국 직원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되는 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부친의 수입이 적은데다 가족이 많아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1949년에 샤먼(厦門; Xiamen)대학에 입학해 1953년 졸업했다. 북경의 한 중학교 교사로 채용됐지만 적응하지 못해 해고를 당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샤먼대학 총장은 그를 이 대학의 사무직원으로 채용했다. 당시 그는 해석적 정수론에 관심을 가지고 후아루오겅(華羅庚, 1910~1985)의 저서 『Additive Theory of Prime Numbers』를 탐독하며 연구했다. 그는 논문 「On Tarry’s problem」을 작성해 후아 교수에게 보냈다. 후아 교수는 그의 수학적 재능을 발견하고 1956년 8월에 중국 수학회 연례 학술회의에서 그에게 연구결과를 발표할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1957년에는 그를 중국 과학원 수학부에 조수로 채용했다. 첸징룬은 여기서 원 문제(circle problem), 약수 문제(divisor problem), 구 문제(sphere problem)과 워링의 문제(Waring’s problem)등을 활기차게 연구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노르웨이 수학자 애틀레 셀버그(Atle Selberg, 1917~2007)가 창안한 ‘체 방법(sieve method)’과 이의 이용에 대해 연구하면서 골드바흐 추측의 해결에 도전했다. 이때가 연구의 전성기였다. 그는 1966년에 첸의 정리를 발표한 후 하루아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끼니를 거르며 무리하게 연구한 끝에 건강을 상당히 해쳤다.

1966년~1976년 이른바 문화혁명 기간에는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받아 건강은 더욱더 악화됐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에는 그의 뛰어난 연구 업적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융성한 대우를 받았다. 그는 1978년에 중국 과학원 수학부 교수로 임명됐고 1980년에는 중국 과학원의 회원으로 선정됐다. 게다가 그는 일등급 국가 기초과학상, 헤리앙-헤리 상, 후아루오겅 수학상 등의 유명한 상도 받았다.

1997년 봄, 4개월 동안 독일 본에 있는 막스-플랑크 수학연구소 초빙교수로 있을 때 경제학을 연구하는 젊은 중국인 교수로부터 첸징룬에 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우연히 들었다. 첸은 중국에서 1978년부터 지금까지 과학 영웅 대우를 받아 왔으며 어린 중국 학생들의 우상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어린 애들에게 크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과학자요’하고 대답했다. 첸의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소비한 종이 양이 트럭 5대 분이 됐다고 한다. 약간 과장된 것 같지만, 증명을 위한 계산이 복잡하고 어려워 그는 많은 양의 종이를 소비하며 계산을 했을 것이다.

끝내 풀어내지 못했지만 노력 자체가  ‘쾌거’

약 8년 전에 필자도 하나의 공식을 얻기 위해 엄청난 양의 계산을 한 경험이 있다. 연구에 너무 몰두해 건강을 해쳤을 뿐만 아니라 결혼 시기도 놓친 딱한 첸징룬을 보고 그의 동료 교수들이 일간지에 구혼광고를 냈다고 한다. 어느 한 병원의 간호사가 이 구혼광고를 보고 자청해 구혼을 수락했다. 이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중국의 한 경제학 교수가 들려줬다.

첸은 1980년, 그녀와 결혼해 아들 하나를 얻었다. 1984년에는 파킨슨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연구는 계속했다. 1996년엔 폐렴 증세로 건강이 악화돼 그해 3월 19일, 첸은 세상을 떠났다. 1999년에 중국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실루엣과 그가 얻은 유명한 부등식(아래)이 담긴 80펜(分) 가격의 우표를 발행했다.

이 우표의 타이틀은 哥德巴赫猜想的最佳結果(가덕파혁 시상적 최가결과: The Best Result of Goldbach Conjecture)이다. 그리고 그를 기리며 추모하기 위해 몇 개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2006년 4월 4일, 그의 모교 샤먼대학의 수학과 건물 앞에 그의 조각상과 그의 업적을 새긴 대리석 석판이 세워졌다. 첸의 상 뒤에 있는 대리석 석판에 그의 이름과 디리클레(Dirichlet), 유티라(Jutila), 린닉(Linnik), 판(Pan)이라는 4명의 수학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96년에는 그의 이름을 따서 그해에 발견된 소행성에  애스터로이드 7681 첸징룬(the Asterroid 7681 Chenjingrun)이라 명명했다.

첸징룬의 피나는 탐구정신, 불굴의 도전정신, 독창력과 집중력은 높이 인정돼야 한다. 특히 그가 골드바흐 추측을 해결하기 위해 과감하게 도전하는 모험심은 대단하다. 그는 이 문제를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닌 채 밤낮을 새워가며 연구한 끝에 이 추측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이의 해답에 근접한 새롭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심오한 진리를 발견하고 증명했다.

외롭게 자기 자신과 싸워가며 누추한 조그만 방에서 몽땅 연필을 들고 계산을 했던 모습을 상상해보라. 큰 난관에 부딪쳐 연구가 진척이 되지 않을 때는 분명히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가난과 영양결핍에 시달린 가운데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을 상당히 해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순수하면서 진정한 탐구정신과 불굴의 도전 정신에 감복한 신이 그에게 수학적 진리, 즉 첸의 정리를 선사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는 중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탐구정신, 모험심과 인내심을 심어줬다. 그래서 지금 중국에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수학자뿐만 아니라 과학자가 상당히 많다.

양재현 인하대·수학통계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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