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21:10 (목)
경전은 목표가 아니라 방법 … 왕양명의 ‘내 마음의 주석’이 특별한 이유
경전은 목표가 아니라 방법 … 왕양명의 ‘내 마음의 주석’이 특별한 이유
  •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 승인 2012.07.09 11: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⑨ 이렇게 읽고 이렇게 이해한다(동양편)

지행합일은 성리학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양명학의 얼굴이었다. 왕양명은 예컨대 효를 잘 알고 있어도 행치 못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을, “행할 줄 모르면 그건 모르는 것”이라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그가 보기에 머리로만 알고 몸으로 행하지 못하는 것의 실상은 ‘無知’였다. 다시 말해 지행합일은 따로 떨어져 있는 지와 행의 ‘사후적’인 합일이 아니라, 행할 능력을 ‘동시에’ 갖춰나감이 곧 알아감의 실제임을 가리켰다. ‘지행’은 애초부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한 단어였다는 것이다. 

경전 탐독보다 선행돼야 하는 건 ‘마음공부’

양명의 이러한 태도는 경전 해석에도 그대로 관철됐다. 『대학』 첫머리의 ‘親民’ 해석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본래 『대학』은 오경의 하나인 『예기』의 한 편이었다. 이를 주희가 성리학을 집대성하며 단행본으로 독립시켰는데, 이때 그는 親民을 ‘新民’으로 바꿨다. 근거는, 원래 ‘新’자였는데 옛사람들이 비슷하게 생긴 ‘親’자로 잘못 적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대학』을 관통하는 정신으로 보건대 “백성을 (피붙이 아끼듯) 사랑하다”보다는 “백성을 (도덕적으로) 새롭게 하다”가 원의에 더 가깝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양명은 이를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문헌학적 동기에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다. 보기에는 한 글자 차이이지만, 그 근저에는 경전과 ‘나’의 관계 설정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도사리고 있었다. 먼저 신민의 경우를 보자. 이는 대학 공부의 목적이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는 뜻인데, 여기서 ‘기준’의 문제가 계기적으로 제기된다. 뭔가에 대해 새롭다고 판정하려면 새로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주는 기준이 ‘먼저’ 또는 ‘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희는 공자 같은 성인의 말씀과 사적이 그 기준이라고 했다. 경전의 학습과 중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거기에는 성인의 말씀과 사적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삶의 주안점을 세상 경영[經世]보다는 道理의 규명에 두었다. 그러니까 도리의 규명은 그의 삶을 주도하는 정신이었고, 경전 학습은 이를 실현하는 실질적인 기반이었다. 실제로 그는 조정의 거듭된 부름에 응하지 않고 경전을 주해하고 도리를 탐구하는 삶을 살았다. 경전에 의한, 도리를 위한 생애였으니, 그렇게 그의 삶은 경전을 위한 주석으로 기념됐다.

이에 반해 양명은 경전을 자기 삶의 주석으로 삼았다. 주희와는 정확하게 반대되는 방향에서 경전과 ‘나’의 관계를 설정한 셈이었다. 그가 신민을 친민으로 환원시킨 것도 일관된 수순이었다. 백성을 피붙이 아끼듯 사랑하는 데 경전의 학습이 꼭 선행될 이유는 없다고 보았다. 그보다는 사랑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구비를 요청했다. 그리고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마음공부’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사람들은 피붙이에 대한 사랑은 본성이지만, 남에 대한 사랑은 본성이 아니라고 여긴다. 양명은 이를 달리 보았다. 그는, 사람의 마음에는 ‘동일하게 그러한 바[所同然]’가 선천적으로 담겨 있고, 그러한 마음에는 천하 만물이 다 담겨 있다[萬物皆備於我心]는 맹자의 통찰에 동의했다.

또한 ‘양지의 실현[致良知]’을 주창하며, 맹자처럼 사람은 누구나 다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지혜[良知]와 익히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역능[良能]을 타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게다가 ‘만물은 한 몸[萬物一體]’이기도 하니, 남을 사랑하는 것 또한 타고난 본성의 발현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굳이 학습을 선행해야 할 필연성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사람에게는 배우지 않고도 지니게 되는 지혜와 할 수 있는 역능이 천부적으로 주어졌기에 반드시 경전을 먼저 학습해야만 뭔가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관건은 경전공부에 있지 않고 마음공부 곧 ‘正心(마음을 바로잡다)’의 실천에 있었다.

양명이 모든 공부의 시발점인 ‘格物’을 正心의 뜻으로 푼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격물은 신민·친민을 행하는 데에 필요한 8가지 과업의 첫 단계이기 때문에 격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친민·신민의 해석만큼이나 중요했다.

주희도 격물 해석에 공을 들여 이렇게 풀었다. 격을 ‘나아가다·이르다[至]’로, 물을 ‘외재하는 객관사물’로 보아, ‘앎을 이루기[致知]’ 위해서 ‘外在하는 事物로 나아가다’가 격물의 참뜻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을 통해 학습한 道理를 개개 사물의 차원에서 재확인하는 작업이었기에, 학문의 시작은 일관되게 경전의 학습이었다.

반면에 양명은 격물을 ‘外在하는 事物을 바로잡다’로 푼 후 그 참뜻은 마음에 그것들을 ‘존재하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주희의 해석과는 두 가지 점에서 분명하게 달랐다. 먼저 물의 경우, 양명은 이를 인식주체인 ‘나’와 격절돼 있는 객관사물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연계된 객관사물로 보았다. 그리고 격은 주희와 달리 ‘바로잡다[正]’는 의미로 풀었다. 곧 외재하는 사물을 바로잡는다 함의 실상은 외재하는 객관사물의 온전한 인식을 방해하는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여기서 격물은 正心의 다른 이름이 되니, 그에게 있어 학문의 시발점은 정심 곧 마음공부였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마음공부는 실천을 위한 요청이었다. 해서, 양명의 삶은 주희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명대를 대표하는 장군으로, 그에게 전장은 지행합일과 치양지를 실현하는 삶터였다. 아니 살아가는 데서 마주하는 모든 일이 그에게는 공부의 계기이자 터전이었다. 이를 통해 하늘이 부여했기에 선할 수밖에 없는 양지와 양능을 회복할 수 있었음이니, ‘일을 하며 공부했다[事上磨練]’는 그의 고백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게다.

주희와 상반된 길을 가는듯 보이지만

결국 양명의 삶을 주도한 정신은 마음의 온전한 정립이었다. 주희처럼 경전에 담겨 있는 도리를 온전히 깨닫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이었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하늘이 사람의 마음에 부여한 선함을 확충시켜나가 현실의 선을 이루는 데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경전공부를 도외시했던 뜻이 아니다.

예컨대 양지와 양능은 가만히 있어도 발휘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환경이나 경험 등으로 인해 가려지고 망각될 수 있었다. 따라서 경전의 학습은 양명학에서도 중요한 계제로 설정된다. 경전의 학습을 통해 ‘나’가 각성돼 마음공부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전에는 양지와 양능을 온전히 발휘했던 성현의 말씀과 사적이 담겨 있기에, 그것은 ‘나’가 행한 마음공부를 점검할 수 있는 미더운 길의 하나였다.

다만 경전을 소환하는 정신이 실천을 위한 마음공부임에 유의해야 한다. 왕양명의 삶을 지탱해준 동력이 마음공부에서 비롯됐음도 기억해야 한다. 단적으로 왕양명의 경우, 경전공부는 마음공부의 일환이었다는 뜻이다. 그에게 경전은 목표가 아니라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희와 다르게 경전을 자기 삶의 주석으로 삼을 수 있었고, 그 삶의 실제가 마음공부였기에 경전이 주석한 바는 결국 왕양명이 행한 마음공부의 소산들이었다.

그렇게 왕양명은 경전을 ‘내 마음의 주석[六經皆注我心]’으로 삼아 주희와는 또 다른 기념비로 역사에 헌정됐다. 결국 경전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이를 어떤 방식으로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상이한 고민이 사람들 사이의 사뭇 다른 삶의 양태를 또 학문세계를 빚어냈던 셈이다.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