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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조력자들의 힘 … “출판하라, 사라질 테니”
숨은 조력자들의 힘 … “출판하라, 사라질 테니”
  • 안재원 서울대 HK연구교수
  • 승인 2012.07.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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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⑧ ‘죽은 책’을 되살리는 사람들(서양편)

모든 텍스트는 소통을 위해 태어난다. 그리고 텍스트는 대개 문헌을 통해 전승된다. 이 문헌은 언어로 기록되는 매체다. 하지만 언어는 변한다. 언어의 이런 속성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텍스트 내용도 크게 달라지게 된다. 일례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들 수 있다.

『일리아스』는 원래 이오니아 지방의 방언으로 불려진 서사시다. 요컨대 서사시가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된 후 대략 400년이 지난 기원전 3세기에 이르면, 『일리아스』는 최초의 원전에서 많이 벗어나 정체성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원전이라 할 수 없는 내용도 많이 삽입되기 때문이다.

함부로 텍스트를 교정하거나 고치지 마라

대표적인 사례가 『일리아스』 제2권 선박목록 대목이다. 이는 트로이 원정에 참여했던 그리스 군대들이 어느 지방에서 온 부대인지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선박 목록에 도시 아테네의 이름은 원래 없었다. 트로이 전쟁 당시 아테네는 이름도 없는 어느 해안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아테네가 강대해지자,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도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다는 기록을 『일리아스』에 삽입하게 된다. 이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명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가 선박 목록에 삽입된다.

하지만 호메로스 서사시는 아테네 버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지방에도 전해지는데, 아테네의 참전 이야기는 후대에 삽입된 위문으로 훗날 학자들에 의해 판명된다.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서양고전학자들은 원전과 원전이 아닌 것들을 일단은 구분한다. 다음으로,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전승된 표현을 존중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낯선 표현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이해하는 수준에서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전승된 표현을 일단은 존중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는 주석을 통해서 해결한다. 이와 같은 서양의 정본 작업의 발전 과정과 관련해서 나는 지난 글(<교수신문> 650호)에서 알두스를 소개했었다. 이유는, 이 사람이 세운 회사에서 출판한 서양 고전의 정본들을 중심으로 유럽이 이제 새로운 정신의 대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흥미로운 점은 또 다른 알두스들이 서양 역사에 계속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레나누스(Beatus Rhenanus, 1485~1547)다.

라인강이 발원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해서 레나누스라 불린다. 레나누스는 프랑스의 파리에서 왕립학사로 주로 활약을 한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고향 스트라스부르그로 돌아간다. 이곳에서 그는 한 편으로 많은 문헌들을 편집하고, 다른 한편으로 많은 학자들과 교류를 나눈다. 이 교류의 반경에 속하는 지역이 독일의 프라이부르그, 스위스의 바젤, 상갈렌, 현재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 지역이다. 이른바 라인학파가 이때 형성됐고, 이 학파는 지금도 서양 학계의 주요 집단으로 활동 중이다. 이는, 인문학의 중심지가 이탈리아가 아니라 알프스를 넘어서 유럽의 심장부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인물로 요한네스 로이클린 (Johannes Reuchlin, 1455~1522)과 필립 멜란크톤(Philipp Melanchton, 1497~1560)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에라스무스와 함께 유럽 북부의 인문학을 주도한 학자들이다. 이들의 활동과 교류에서 중요한 점은 한편으로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 편집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에 중요한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멜란크톤은 비텐베르크에서 1518년에 대학을 다녔는데, 이곳에서 루터를 만난다. 이 만남은 이후 『신약성경』 해석의 전통에서 볼 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서 서양고전문헌학이 세속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지 확인된다. 죽은 책들을 살리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체계화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칸터(William Canter, 1566)의 정리를 소개하자.

그리스 문헌 교정 방법에 대한 일목
1. 철자 생략과 제거해야 할 철자
2. 음절과 단어의 생략과 제거
3. 난외 주석에 있는 주석 처리
4. 단어의 결합과 분리
5. 철자와 단어의 위치 이동
6. 액센트 
7. 동일한 철자나 동일한 단어로 끝나는 경우 생략
8. 생략 표현의 해독

인용은 서양의 정본 작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필사본들을 본격적으로 비교하고 문법적으로 맞지 않거나 혹은 문맥에 의미가 상통하지 않으면, 필사본의 비판적 대조를 통해서 문헌들을 편집한다는 점이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필사본들을 비교하다 보면, 크게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전승 과정에서 잘못 표기된 단어들의 처리가 그 중 하나다. 잘못 필사된 단어 가운데에는 유일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표현(hapax legomena)들도 많다. 이런 사정 때문에 틀렸다고 함부로 지우거나 교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하나는 단어들이 올바르게 표기 돼 전해져 왔다 해도, 의미 변화로 인해 텍스트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그 것이다. 예를 들어, 원래는 일상어였는데, 전문어로 사용된 경우, 즉 사회 문화사적 변동으로부터 생겨난 의미 변화 경우도 이해가 안 된다 해서 함부로 텍스트를 교정하거나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당시의 문헌학자들은 한 단어가 형태적으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리고 그 단어의 의미 변화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사전 갖기를 꿈꾸게 된다.

이 꿈의 실현체가 바로 『Thesaurus linguae Latinae』 사전이고 『Thesaurus linguae Graecae』이다. 이 대사전들은 크게 두 가지를 목표로 한다. 하나는 개별 단어에 나타나는 문법적, 혹은 언어학적 특이 사항들을 모두 기술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개별 단어의 일생사(fatum verbi)를 보고하는 것이다. 마치 개인의 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전의 개별 항목은 한 단어가 어떻게 태어나서,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형태와 의미가 변하고, 시대와 공간의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다른 단어로 대체됐는지, 혹은 축소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를 기술한다. 따라서, 대사전을 만들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 것도 16세기다.

사전학의 시조(Princeps Lexicographorum)라는 칭호를 얻은 로베르트 스테파누스(Robertus Stephanus)는 직접 자료를 모아 분석해 『Thesaurus linguae Latinae』 사전을 1531년 파리에서, 그리스 사전의 경우 로베르트 스테파누스의 아들 앙리 스테파누스가 1572년 런던에서 출판한다.

서양, 정본작업 체계화에 300년 걸려

이상이 16세기 문헌학자들에 대한 간략한 보고다. 그러면, 17세기의 문헌학자들에 대해 소개하겠다. 대표적으로 베네딕트 교단 소속의 사제인 시몬(Richard Simon, 1638~1712)과 마빌론(Jean Mabillon, 1632~1707)이 그들이다. 시몬은 『성경』 사본학의 시조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특히 『구약 성경의 「판본 역사」에 비판적 접근(critical history of Old Testament)』를 1678년에 저술한다. 이어 1689년에는 『신약성경』의 사본 전승사 연구를 착수한다. 이 연구를 통해서 문헌 전승사(Textgeschichte)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무대가 열린다. 이렇게 시작한 문헌 연구는 300년 이후 소위  파올 마아스의 문헌계보도(stemma codicum) 이론으로, 웨스트(M. L. West)같은 문헌학자에 의해서 비판정본(text critic)의 논의로 발전한다.

이어 마빌론에 대해서 소개하겠다. 마빌론은 유명한 생 제르망 출판사에 43년 동안 근무한다. 이 기간 중에 그는 『고문헌에 대해(De re diplomatica)』를 집필한다. 자신의 출판 경험을 일반화한 것인데, 이를 통해서 그는 고문서학을 창시한다. 예컨대 고대 라틴 문헌 필사본의 역사와 진위 문제를 단순한 直感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필사본들의 체계적인 문헌 비교와 서지학적을 고증을 통해서 문헌의 역사와 진위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사실, 17세기의 문헌학은 18세기의 그것과 크게 분리되지 않는다.

다시 프랑스 출신 문헌학자를 언급하겠다. 마빌론의 동요 사제였던 몽파우콘(Bernard de Montfaucon, 1655~1741)은 1708년에 『그리스 판독학(Palaeographia Graeca)』이라는 저서를 집필하기 때문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1만1천630 두루마리의 필사본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고 그 필사본을 어떻게 판독하고 해독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들을 정리한다. 고문헌판독학(Palaeographia)이 이 사람으로부터 본격화되고 이론화 됐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서양고전문헌학이 이제는 완전히 유럽의 심장부에 자리잡게 되는 과정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소리다. 모든 위대함 뒤에는 그 후광의 이면에서 이름없이 노력한 이들의 땀과 희생이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찌됐든, 서양의 정본 작업이 방법론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체계화되는 되는 데에 약 300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한데, 여기에서 잠시! 서양의 문헌학자들이 이런 시도를 한 이유는 문헌 자체에 대한 이해와 문헌을 단지 잘 보존하기 위함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문헌을 당대의 텍스트로 복원해서 그것을 안전하게 연구자들과 다른 일반 독자들에게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모든 문헌은 “출판하라, 아니면 사라지는 것(Publish, or perish!)”이기 때문이다. 책의 주인은 본시 독자이지, 고문서 보관소가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끝으로, 이 글은 <교수신문> 650호에 실린 윤상민 기자의 기사(‘일·중에 우리 학문의 해석권 뺏길 수 있다’ 학계, 고전텍스트 정본화 위한 국가위원회 요청)에 대한 작은 동의임을 밝힌다. 이미 약속했다시피, 이번 호의 주제가 ‘죽은 책들을 되살린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마침 한국 고전의 정본 작업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지적하는 윤 기자의 기사와도 연결돼 있고, 또한 서양의 역사도 나름 참조 사례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재원 서울대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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