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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의 자기위시 훨씬 강했던 유럽 황제들
권력자의 자기위시 훨씬 강했던 유럽 황제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6.26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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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의 ‘君主 초상화’, 어떻게 다를까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미술학과) 하면 ‘초상화’가 곧장 연상된다. 『한국초상화연구』(1983)을 필두로 『화가와 자화상』(1995),『초상화 연구-초상화와 초상화론』(2007), 『한국의 초상화-形과 影의 예술』(2010) 등의 관련 저술을 상재해왔다. 이런 이력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관심은 ‘초상화’ 즉, 문제적 인물들의 얼굴에 집중돼왔다. 그런 그가 최근 『왕의 얼굴-한·중·일 군주 초상화를 말하다』(사회평론, 2012.6)를 출간해 또다시 눈길을 끌고 있다.

 한·중·일 세 나라가 모두 군주의 초상화를 국책사업으로 진행했지만, 군주의 초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씩 달랐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중국의 경우, 그것은 ‘선전’과 정책홍보로, 일본의 경우에는 애도·추모·기념으로, 그리고 우리의 경우 ‘극단적 사실감’을 바탕으로 ‘정통성’을 상징하는 강력한 조형물이었다는 것. 왕의 초상화에서 당대의 시대적 특성을 읽어나간 조 교수는, 동아시아의 군주 초상을 다시 서양의 군주 초상과 비교하면서 책을 마무리했다. 저자의 이 흥미로운 접근 가운데 동아시아의 군주 초상과 서양의 군주 초상을 비교한 부분을 발췌했다.

 

▲ 이 영조 어진(부분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1744년 장경주, 김두량 등이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0년 채용신, 조석진 등이 이모해 그려냈다. 제사를 지내는 용도가 아니기 때문에 아담한 크기의 반신상으로 그려졌다.

 

그러면 이제 시야를 넓혀서 우리 동아시아 군주 초상화와 서양의 군주 초상화를 잠시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합니다. 초상화에서 그려진 인물의 안면각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특히 정면관은 추모나 기념적 의도로 제작된 일본 천황상에서는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지만, 국가적으로 봉안사업을 벌였던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누차 시도돼왔습니다. 특히 중국은 명 영종부터 청이 몰락할 때까지 진전에 모시는 의례용 황제상은 줄곧 정면상으로 그렸습니다.

이런 정면관이 주는 근엄성은 유럽의 군주상에서도 확인되는데, 앵그르가 그린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은 그 좋은 예입니다.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앞쪽을 응시하고 있는 나폴레옹은 마치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겐트제단화의 예수 모습과 비견될 정도로 당당하고 영웅적인 모습입니다. 나폴레옹 1세로서의 권위와 그 정통성을 한 눈에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사방에 보입니다. 바닥에 깔린 카펫에는 고대 로마와 카롤링거 왕조(751~888)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있으며, 옷에는 프랑크족의 벌 문양이 보입니다. 오른손에는 프랑스 황제의 권능을 상징하는 샤를 5세(재위 1364~1380)의 왕홀을 쥐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지만, 허벅지 안쪽에는 샤를마뉴 대제(재위 768~814)의 검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레길리아(regalia), 즉 왕권의 상징물들은 이미 루이 14세 초상에서도 등장했던 것으로 유서 깊은 프랑스 황제로서의 권위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동아시아 군주상에서는 왕조나 국가의 상징물이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어진은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손 자체가 보이지 않고, 따라서 손에 쥔 지물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복 차림인 철종 어진의 경우, 왼손은 의자 손잡이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에 일종의 채찍인 등채를 들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역시 국가나 왕조의 상징물은 아닙니다. 또한 고종 어진 역시 손이 소매 바깥으로 나와 있기는 하지만 얌전하게 무릎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일본 천황상의 경우는 천황이 상황을 그린 속체상에서는 손이 소매바깥으로 나오지만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으며, 출가한 뒤 그려진 법체상에서는 간혹 지물을 들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염주나 오고저 등 불교관계의 지물들이지 천황이나 국가의 상징물은 아닙니다. 중국 황제상의 경우 손의 포즈는 도판에서 보듯이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를 보입니다. 특히 한 손은 무릎위에 한 손은 각대나 조주를 잡는 명·청대 중국 황제상에 나타나는 손의 포즈는 우리 어진들과 비교하면 무언가 멋을 부리고 있으며, 나아가 자기현시적 느낌도 일견 감지됩니다. 그러나 이런 포즈들을 「루이 14세 초상」같은 유럽의 제후상들과 비교하면 印象操作효과(impression management)를 통한 권력자의 자기시위란 점에서 볼 때 현격하게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 초상」에서 황제는 담비털을 덧대고 황금백합무늬가 수놓인 파란색 대관식 망토를 입고 연단에 서 있습니다.

루이 14세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꼭대기가 백합 모양의 왕홀과 허리춤에 찬 대관식 검, 오른쪽으로는 황금 백합 무늬의 푸른색 방석 위에 정의의 손과 프랑스의 왕관이 모든 프랑스 왕의 상징물들입니다. 특히 허리에 손을 얹고 돌아보는 자세는 남성적 섹슈얼리티와도 연결되는데, 이런 점은 동아시아 군주상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특성입니다. 한편 한국이나 일본은 제의용 초상화 위주로 군주 초상화가 발달되지만, 중국은 유니크하게도 비제의용 초상화도 함께 발달했습니다.

특히 청대의 강희·옹정·건륭제에 이르면 황제의 일상을 다룬 모습이나 행락도 등도 압도적으로 성행합니다. 그 중에는 好文의 군주로서의 면모나 무가적 통치자로서의 면모, 또는 황제의 보살핌이 고루 미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기록화적 의미의 황제상도 있습니다. 일상적인 모습을 제재로 다루는 것은 서양의 군주 초상화에서도 제법 발견되는 형식으로서, 「수렵장의 찰스 1세 초상」이나 「카를 5세 기마상」은 그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 얼핏 보아 군주의 자유로운 일상을 별다른 의도 없이 그려낸 듯한 이런 작품들은 실상은 어떤 확고한 계산 하에 제작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스튜어트 왕조의 찰스 1세(재위 1600~1649)는 악정으로 의회에 권리청원이 제출돼 비난을 당했고, 결국 의회를 해산하고 무려 11년간이나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던 영국의 왕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 앵그르가 그린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정면상이 주는 근엄성과 함께 왕권의 상징물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수렵장의 찰스 1세」라는 초상화에서 그는 수렵복을 입고 미소를 띤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청교도혁명으로 단죄받은 전제적 군주가 아니라 우아하고 교양이 풍부한 극도로 세련된 신사로 표현돼 있습니다. 또한 「카를 5세 기마상」역시 완벽한 각본 하에 연출된 것입니다. 카를 5세(1500~1556)는 1547년 독일 루터파 제후들과 뮐베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티치아노에게 초상화를 주문했습니다. 이에 티치아노는 실제 전투 장면 속의 황제 모습이 아니라 뮐베르크의 석양을 배경으로 해서 전투 당시의 갑옷에 붉은 휘장을 두르고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는 고독한 황제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티치아노는 당시 유럽에서 종횡으로 대활약을 펼친 황제를 피로와 멜랑콜리가 담긴 고독하고 내성적인 모습으로 묘출했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을 배경으로 해서 투구 밑쪽으로 보이는 강인한 턱 선과 굳게 다문 입의 표현은, 고독하기에 더욱 영웅적인 황제의 이미지를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아마도 동아시아의 군주 초상화 가운데 중국 황제상의 가장 독보적인 장르는 분장초상화일 것입니다. 「윤진행락도」라는 화첩에서 드러나듯이 황제 초상은 당시 중국이 처해 있던 다종족, 다문화현실을 반영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문화적 우위에 있던 한족들의 통치자로서의 모습, 자신의 혈통인 만주족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활쏘기와 말타기의 명수로서의 모습, 우위에 서서 잘 포섭해나가야 했던 인도·무굴·티베트·터키인으로 분장한 모습, 심지어는 서양인으로 분장한 모습 등 활제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소화해가면서 화면에 등장했습니다. 물론 황제나 왕 또는 여왕이 다른 인물로 분장해 초상화로 그려지는 방식 역시 유럽의 군주상에서도 나타납니다. 루이 13세(재위 1610~1643)의 궁정화가 시몽 부에는 「프랑스 왕국와 나바르 왕국의 의인상에 둘러싸인 루이 13세 초상」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1620년 나바르 광국을 차지한 루이 13세의 공적을 찬양한 것으로, 두 왕국을 여인상으로 의인화하는 가운데 루이 13세는 갑옷을 입고 월계관을 쓴 승리자 모습으로 분장하고 그려져 있습니다. 나아가 루벤스는 앙리 4세의 왕후이자 메디치 가문의 영애였던 「마리 드 메디치 초상」을 그렸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투구를 쓰고 군대 지휘봉을 든 전쟁과 지혜의 신 미네르바로 분장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신화의 여신으로서 우의적 상징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세속적 존재를 넘어서 신성을 부여한 분장초상화는 중국 황제상에서도 발견됩니다. 건륭제는 문인이나 은사, 도사 등 세속적 인물로 분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 존재로 분했습니다. 황제는 당시 지혜의 원형으로 숭배를 받던 문수보살로 분장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보현보살로 분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재가신자인 유마거사로 분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장초상화는 하나같이 우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상당히 정치적 선전성이 강한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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