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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은 정치의 영역인가 아니면 학문의 영역인가?
이 상황은 정치의 영역인가 아니면 학문의 영역인가?
  • 김미경 히로시마시립대 히로시마평화연구소 부교수
  • 승인 2012.06.2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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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_ ‘영유권 분쟁 관련 일본인의 의식조사’를 하며 겪은 일

김미경 히로시마시립대 히로시마평화연구소 부교수
지난 2월 말, 몸담고 있는 일본의 대학이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용역 주제인 ‘영유권 분쟁관련 일본인의 의식조사’ 계약서에 서명을 거부했을 때 일단 상황은 정리된 듯싶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해’ 승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계약예상시점 한 달 이상을 넘긴 뒤 가까스로 들을 수 있었다. 혼자서 연구를 진행해도 학문의 자유원칙을 고려해서 막을 수는 없지만 학교로서는 일체 관계가 없는 개인연구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그래서 동북아재단과 개인연구자 자격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런 설명을 듣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 측의 지체 때문에 다른 연구자들까지 연구비를 지급받고 못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상황설명으로도 일본의 문화코드인 ‘배려의 정신 (思いやり)’은 전혀 발휘되지 않았다. 일본어로 번역된 일체의 관련서류를 제출하라는 요구에 ‘예산으로 얼짱스티커를 구입하면 안 된다’는 세세한 모든 규정을 번역, 제출한 다음에도 줄곧 감감 무소식이었다. 생각다 못해 배수진이라도 친다는 심정으로‘내일 서울 출장’이라는 카드를 내밀고서야 마침내 총장 이하 학교 간부들이 총 집합한 자리에서 승인불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곧 훌훌, 다 털어냈다. 그러려니 했었다. 반가운 소식은 분명 아니었지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판단도 아니었다. 한일관계에 무척이나 중요한 영유권 분쟁에 관한 연구이기에, 또 동북아 평화건설의 매우 유의미한 변수이기에 혼자서 그냥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건 학자가 반듯이 지켜내야만 하는 소신과 신념의 선은 분명히 있다.‘정치적 민감성’의 잣대로 주제를 고르기 시작하면 연구해선 안 되는 주제가 너무 많아진다. 지금까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팔색조 같은 학자가 존경을 받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학자는 학자여야지 정치가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면 그 날로 학문인생은 끝’이라는 비장함은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혼자서 가기로 한 뒤 5월 말경까지는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여론조사는 진행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행정실 직원이 내게 ‘약 30분 뒤 어떤 손님이 찾아온다’는 전갈을 했다. 마침 약속이 있던 나는 그 분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고 대신 남긴 메시지는 전해들을 수 있었다. 어느 60대의 남자분(이하 A씨)은 다음과 같은 6개항의 질문들을 남기고 곧 답을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① 발신인의 이름, 직함, 주소가 여론조사 발신봉투에 적혀있지 않다.
② 여론조사의 목적, 가설 등을 포함한 연구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과 충분한 서술이 설문지에 나와 있지 않다.
③ 자신이 어떻게 여론조사참여자로 선택되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설문지에 나와 있지 않다.
④  반송주소가 히로시마 평화연구소가 아닌 개인의 자택주소인데 이는 연구자 본인이 아닌 타인이 악의를 가지고 연구자의 개인주소를 도용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만약 연구자가 사실관계로 연구소 소속 교수라면 반송주소는 연구소가 되어야만 한다.
⑤ 영유권분쟁에 관한 조사는 민감한 국제문제이기 때문에 발신자를 신뢰할 만한 충분한 근거의 제공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야만 한다.
⑥ 질문지가 자신 개인 주택의 주소로 배달되었다. 어떻게 자신의 주소를 알았는지 설명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조금 당황했던 나는 이 메시지를 전달한 행정실 직원의 코멘트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여론조사는 적절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다음에 또 이런 조사를 하려면 제게 알려주십시오. 제가 기꺼이 여론조사 연구는 어떻게 실시해야 하는지 가르쳐드리지요.’지금까지 여러 연구에 여론조사방법을 써온 본 연구자에게 비전문가인 남자 행정직원이 자신의 지도편달을 받으라는 조언은 ‘당신은 분명 아무 것도 모르는 외국인’일 뿐이라는 맥락으로 충분히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일본에서 가끔 일어나는‘오, 마이 갓!’의 순간이었다.

타 문화를 연구함은 결코 쉽지 않다. 현지 조사자는 관찰대상과의 적절한 심리적 거리유지, 자기문화중심적 판단의 경계, 섣부른 결론 도출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 차례 확인, 의문, 재확인, 재의문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사회학과 대학원 유학시절 미국 남부 조지아주 아틀란타시 중심부에서 흑인들을 상대로 가발가게, 옷 가게를 경영하는 한인이민자들과 흑인 고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충돌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현장관찰을 한 경험이 있다. 양 집단 모두에게서 신뢰를 받지 못하던 본 연구자는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한인이민자 가게에서 석 달을 넘게 무보수 점원으로 자원봉사를 해가면서 고객들에게는 친근감을 주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MC Hammer, Dr. Dre 등의 얼굴이 찍힌 T셔츠를 입고 흑인식 Braids로 머리를 땋아가며 현장관찰을 했었다. 연구가 끝날 즈음엔 가게주인은 좀 더 오래 유보수로 일하기를 원했고 그 사이 정이든 고객들과는 서로 부둥켜 안고 헤어짐을 안타까워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이 상황은 분명 성격이 좀 달랐다. 일본에서 교수가 된 지 7년, 그리고 정년보장을 받은 지 4년이 되었건만 외국인 이름을 가진‘발신자를 신뢰할 만하다는 충분한 근거의 제공’에는 실패한 자신을 발견했다. 일면식도, 서로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는 A씨의 판단기준에 따르면 민감한 국제문제를 외국인의 이름을 가진 연구자가 수행하기엔 너무 의심스런 구석이 많았던 듯이 보였다. 이건 애초부터 대학의 판단기준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결국 문제는 타자화 프레이밍(framing)의 딜레마였다.

학교에서 연구용역 승인을 거부한 결과 연구소 주소를 쓸 수가 없었고 여론조사 참여자의 주소와 이름은 전화번호부 무작위 추출이었고 구체적인 가설이나 목적은 연구계획서에 명시되어 있으나 출판 전에 미리 알리는 것은 학계의 관행에 맞지 않는다는 설명에도 A씨의 집요한 추궁과 의심은 끝이 나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거기다가 여론조사 반송용으로 내 집주소를 쓰겠다고 했을 때 상황을 알고 있던 일본의 지인들이 한 말들이 새삼스레 머리 속을 둥둥 떠다녔다. ‘너, 어느 날 갑자기 선글라스 낀 남자들이 네 집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해.’ 와우!

이 건을 계기로 대학집행부, 그 예의 행정실 직원, A씨, 그리고 나 사이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공격과 반격이 진행되었다. ‘주소는 NTT전화번호부에 나온다’는 설명에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 당신이 어디선가 불법으로 알아냈다’는 반격. 이에 따른 대학 측의 객관적인 증거제출 요구와 학문적 자유권 보장의 반론. 반론에 따른 징계위원회 소집이라는 위협적 반응. 제출된 증거를 믿지 못한 대학 측의 원본대조. 그 증거를 보고서야 자신의 오해를 한편으론 인정하면서도 연구의 구체적인 가설과 목적, 그리고 표본인구 무작위 추출의 과정에 사용된 일체의 전화번호부들을 자신의 눈 앞에 가지고 와 한 단계, 한 단계 설명해가며 직접 연출하라는 요구. 이에 따른 대학 측의 전심전력 대응 요구. 그에 따른 여론조사 참가자 익명성 보호의 원칙주장. 즉 만약 본 연구자가A씨 앞에서 구체적으로 무작위 표본추출과정을 다 설명한 결과 만에 하나 이 분이 다른 참가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게 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공동책임을 질 것을 요구’한 시점에서 학교측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의 키워드는 ‘공동책임’이다.

6월 말, 이 시점까지 ‘영유권 분쟁 관련 일본인의 의식조사 연구’는 각종 도전과 대응 속에서 예상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하지만 좀 더 질겨진 집념으로 진행 중이다. 현재도 대학은 본 연구자에게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결과, 관련된 일체의 미 출판 자료와 모든 과정 하나, 하나에 관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 상황은 정치의 영역인가, 아니면 학문의 영역인가? 이 상황이 언제, 어떤 식으로 끝이 날지 궁금하다.

 

김미경 일본 히로시마시립대 히로시마 평화연구소 부교수

필자는 미국 조지아대에서 사회학 박사를 했다. 미국 포틀랜드주립대 풀브라이트 방문교수를 지냈다. <North Korean Review >(SSCI Journal, McFarland Publisher)의 공동편집장으로 있으며, 2012년 미국 인터내셔널 스터디즈 어소시에이션(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연례학술회의에서 내년 인권분과 프로그램 체어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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