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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준비 않으면 한국 인문학 ‘감상문’ 수준 그칠 것
“지금 준비 않으면 한국 인문학 ‘감상문’ 수준 그칠 것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6.25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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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고전 텍스트 정본화 사업’ 학술대회

지난 18일 ‘한국학 고전 텍스트 정본화 사업의 필요성과 시급성’이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대회는 만시지탄의 감은 있지만, 시의적절한 논의였다. 정본 부재는 국내연구자들의 정력과 시간을 오랫동안 허비하게 했던 학문적 장애이기도 했다.

사실 국내 인문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텍스트의 번역과 해석이었다. 연구재단이나 민간재단의 지원도 이 분야에 치우쳐져 있다. 결과물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본화 작업은 6개월간 수많은 판본을 수집해 작업한 결과물이 誤字 3곳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연구가 아니라는 주장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태수 인제대 교수(학술협의회 이사장)는 번역과 해석에 권위를 부여하는 정본화가 더 중요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기조발제에서 “정본을 확립하는 일은 인문학의 출발점이다. 그간 우리 학자들이 문구에 매달리는 것을 소인배의 일로, 문자 배면의 뜻과 직거래하는 것이 대학자라는 관념을 가지고 외국에서 수입한 문헌의 해석에 더 열중하다보니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라고 국내 인문학계의 현실을 진단했다.

그는 “정본사업을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 인문학은 해석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감상문 수준의 글쓰기’에 머무를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텍스트 전산화 사업’을 필요조건이라고 명시하고 최종적으로 온라인 서비스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 차원의 위원회가 이 모든 DB를 표준화 해 일관적으로 관리해야만 우리 인문학이 좀 더 학문적으로 엄격한 모습을 갖출 수 있다는 이야기다.

DB표준관리와 페르세우스 전자도서관

이어진 발표에서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정본화 사업을 국가가 지원해야만 하는 세 가지 이유로 개인적으로 불가능한 연구분량, 경제적 문제, 한국 인문학이 수입인문학의 과거를 벗어나 자생인문학으로 거듭나야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안 교수는 새로운 매체가 학문의 주도권을 결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며 미국 터프트 대학의 ‘페르세우스 전자도서관’을 그 예로 들었다. 페르세우스 전자도서관은 르네상스를 주도한 알두스 출판사가 1994년 건립 500주년을 맞아 미국 의회의 후원으로 시작한 디지털 프로젝트다. 서양 고전과 관련된 모든 텍스트들의 전산화 돼 원전, 번역, 주해 및 2차 연구 논문까지 전 세계인에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안 교수는 페루세우스 전자도서관의 성공 이유로 정본 확보를 꼽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시범적으로 10여 년간 진행했던 네 개 연구소의 정본화 사업 실제 참여 연구자들의 발표도 이어졌다. 개성이 다른 학자들을 각 연구소가 정본화 한 과정을 한 자리에서 비교하는 자리라 실용적인 정보가 오갔다.

『정본 퇴계전서』의 1차 정본화작업을 마치고 2차에 접어든 문석윤 경희대 교수(철학)은 정본 작업을 단계별로 세밀하게 설명했다. 우선 해당 자료를 수집, 전수 조사 및 목록작업을 하는 것이 그 첫 단계이다. 이 자료들에 대한 디지털 촬영 및 복사는 말할 것도 없다. 추가자료가 발견되면 계속해서 추가 촬영을 해 확보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두 번째 단계는 저작표를 작성하고 문헌고를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작표란 각 저작별로 의미 있는 이본 자료 전체를 통괄하여 목록화 한 것을 가리킨다. 세 번째 단계에서 기본 대본과 대조 대본을 확정짓고 교감과 정리를 시행한다. 기본 대본은 조사 된 자료 중에 최선본으로 하고, 여타 자료들은 대조 대본으로 활용한다. 이 대본들을 가지고 서로 비교하는 것을 교감이라고 하며 학문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원로 학자들이 참여하는 편이다.

이렇게 완성된 일차 완성본은 검수 및 교열의 과정을 한 번 더 거친다. 지루하고도 세밀한 작업을 수년간 진행해 1차 완성본을 만들었지만, 문 교수는 이를 정본이라고 부르기 주저한다. 오히려 ‘대조본’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정본이라는 것은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언제든  위치가 바뀔 수 있기에 가장 정본화 작업을 마친 가장 정본에 근접한 텍스트를 ‘비판정본’이라고 부른다. 문 교수는 지금 진행중인 2차 정본화 사업을 마치면 세계 연구자들에게 서비스될 수 있는 ‘비판정본’ 수준이 될 것이라고 했다

2001년부터 시작해 곧 출간을 앞둔 『여유당전서』의 정본화 작업은 다산학술문화재단이다. 정인보, 안재홍이 1936년판 신조선사에서 154권 76책으로 출간한 저술이 있지만, 오탈자가 심각하게 많고, 중국의 『유장』사업영향으로 새롭게 정본화를 시작한 것이다. 이주행 선임연구원은 정본화 작업 초기부터 해외 다산학 및 한국학 연구자와 교류를 했다.

이 연구원은 연구비가 부족할 때, 정본화 사업의 가치를 알아본 외국 대학이 출판비용을 대겠다는 제의도 했지만, 거절했다. 민족 지적 자산의 보고를 외국에 넘길 수는 없는 학자의 자존심이었다. 이 연구원은 중국의 『유장』사업 속에 다산 정약용의 경학자료는 물론 많은 선조 학자들이 포함돼 있음을 우려하며 국가 문화사업 차원의 기획과 재정지원, 중심기관의 역할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독본화’ 작업도 중요…한국국학총서 선정해야”

『우암전서』의 정본화 작업을 이끈 서대원 충북대 기초교육원 교수는 정본화 못지않게 독본화도 중요함을 역설했다. 독본화란 정본화 이후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서비스 작업을 의미한다. 외국 연구자 중 한국 고전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원본을 본 적이 있지만 ‘정본’과 ‘독본’의 부재로 연구에 곤혹을 겪고 있다. 서 교수는 이들이야말로 ‘독본’의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 교수는 “고전을 영역해서 외국 연구자들이 읽어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영역은 훌륭한 독본을 본 한국학에 정통한 영미인이 해야 하는 후차작업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국학의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도 ‘한국국학총서’가 선정돼야하고, 그것이 정본화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산 정약용의 그늘에 가렸지만 조선이 낳은 또 한 명의 위대한 실학자, 풍석 서유구의 252만자로 거질인데다가 필사본도 여러 종이 있는『임원경제지』가 한 독지가의 지원으로 정본화를 마쳐 화제가 됐다.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 소장은 규장각본『임원경제지』를 활용한 논문의 오류(표절, 번역, 필사의 오류)가 심각함을 파악하고 정본화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저서들의 경우, 수치와 정보의 세세함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 소장은『여암전서』,『택리지』,『의방유취』등 정본화에 시급한 자료들이 너무 많은데, 이를 함께할 연구 인력이 너무 부족하고, 장기적인 정본화 사업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김백희 선임연구원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본화 사업에 대한 권위를 독점하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표준화된 DB를 구축하고 인터넷 서비스를 하는 것은 한 한 기관에서 관리해야 효율적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중국의 유장사업, 일본의 불교고문서 정본화사업으로 이미 동아시아의 사상 전쟁이 소리 없이 시작된 시점에서 학계의 기민한 대응이 요구된다.

학자들의 지혜가 수렴되고 국가 주도의 위원회가 결성돼 향후 정본화 작업의 방향을 잡아낸다면 사상전쟁의 전망은 그리 어둡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 첫 단추를 꿰는 과제가 눈앞에 놓여 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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