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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宮禁이 풀리다?
경복궁, 宮禁이 풀리다?
  •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 승인 2012.06.20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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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보이기와 보기 그리고 이용하기의 기시감

경복궁은 서울이라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 중에서도 가장 권력과 가까운 공간이었다. 경복궁은 패배한 기존의 권위를 상징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권력의 보금자리라는 점에서 이중성을 보인다. 특히 1896년 고종이 경복궁을 떠난 이후 상당한 시간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을 ‘파괴’하고 ‘활용’하는 방식에 반복적인 기시감이 나타나는 것은 경복궁이 가지는 이러한 특성에서 기인한다.

19세기 후반 광화문 거리

1896년 고종이 떠난 직후부터 많은 외국인이 앞을 다투어 경복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요 관람자는 일본 군인이었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경복궁의 문은 점점 더 개방됐다. 고종황제가 강제퇴위당한 1907년에는 일본인의 방문이 더욱 급증해 8월에만도 일본군 사오백 명이 경복궁을 구경하기도 했다. 1908년 3월 8일부터 궁내부는 경복궁을 일반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1908년 4월 19일 일요일 하루 동안 경복궁을 구경한 사람은 2천118명에 이르렀고 당시 경복궁을 구경하는 사람은 매일 수백 명에 달할 정도였다.

경회루 일대는 1907년 10월 일본 왕세자의 방문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일본 귀빈’들의 연회장으로 이용됐다. 1909년 7월에 열린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송별하고 소네 신임 통감 환영하는 연회에는 한국과 일본의 관리 1천800명이 참가하기도 했다. 한편 한성부민회에서는 일본인 관광단을 환영하는 연회를 개최하며 한복을 입은 사람을 쫓아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10년 국권 상실 직후 경복궁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13년 새롭게 즉위한 다이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축일을 맞이해 경복궁에서 ‘관민연합 대봉축회’가 거행됐다. 식장은 근정전이었고, 광화문에는 일장기를 교차해 놓고, 흥례문에서는 각종 매점을 만들어 기념물을 판매하고, 근정문 안에는 국화 품평회와 식장을 차리고, 사정문 안에는 축하주를 배포하고, 강녕문 안에는 연회장을 차려 일본과 한국의 기생들이 춤을 추었다. 만여 명의 축하객들이 만세를 부르며 맥주병을 양 손에 들고 흥청망청 놀았다.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포스터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을 새로운 청사 부지로 선정하고 1916년부터 공사를 강행했다. 이 공사 기간은 박람회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은 조선인의 전통과 자존심을 부정하며 일제의 문명적 우월함과 지배의 정당성을 과시하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1915년에 열렸던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의 포스터에도 조선을 상징하는 경복궁 경회루, 근정전은 석양의 어둠에 잠겨가고 일제의 지배로 인한 전달되는 새로운 문명을 상징하는 공진회장은 밝은 대낮으로 표현돼 있다. 이를 조선인의 상징, ‘기생’이 흥겹게 환영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10월 1일 총독부청사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날은 자신들이 한국을 강점한 것을 기념해 만든 ‘시정기념일’이었다. 경복궁은 행정의 공간인 조선총독부 청사, 문화적 정당성을 구현하는 공간인 박물관, 벚꽃을 심어 일본적 경관을 창출하며 총독부 관리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는 후원 공간으로 크게 3분화됐다고 할 수 있다. 경회루 일대의 잔디밭은 골프연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근정전은 각종 행사장이나 초혼제, 위령제의 공간으로 변해갔고 경회루는 각종 ‘지원병’, ‘황군’, ‘근로보국대’를 격려하는 연회를 베푸는 장소가 됐다.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청사는 미군정청사로 이용됐다. 미군정기 경복궁 내에 미군의 간이 숙소를 건립하는 것을 두고 반대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결국 미군정은 숙소 위치를 약간 변경한 채 숙사를 건립했다. 이때 지어진 미군숙소 22동은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됐고, 각 부처에 배당해 관사로 사용했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구총독부청사를 계속해서 행정의 중심지로서 사용했다. 중앙청은 곧이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잠시 인민군 청사로 이용되다 그들이 퇴각할 때 불을 질러 내부가 소실됐고 그나마 남아 있던 나머지 경복궁의 건물들도 한국전쟁으로 크게 파괴됐다.

1960년대 경복궁은 다시 활용되기 시작하며 여러 가지 기능이 덧씌워졌다. 파괴된 중앙청은 10여 년이 흐른 1961년에야 복구기술위원회가 구성돼 1962년 11월부터 다시 행정의 공간으로 이용됐다. 또한 서북쪽 일대에 30경비단이 들어서면서 부대 일대 및 신무문과 경회루에 대한 출입이 제한됐다. 방치되던 경복궁에 대한 문화재 보존을 위한 노력도 미미하지만 시작됐다.

한편으로 경복궁은 4ㆍ19 이후 다시 개방되며 공원적 성격도 강화됐다. ‘아메리카 카우보이쇼’, ‘국제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1962년에는 ‘군사혁명1주년 산업박람회’가 개최됐다. 박람회장에는 각종 진열관과 공연관 등 30채의 건물이 설치됐다. 국제관에는 미국의 인공위성 모델이 진열되고, 반공관이 마련됐다. 당시 문화재 관리국장 문응국 대령은 3개년 계획으로 경복궁을 분수와 화단, 야외극장, 어린이놀이터, 동물원 등이 구비된 대규모 시민공원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1963년 10월에는 경회루 동쪽 약 7천 평의 잔디밭을 헐어 골프장을 만들려다가 중단되기도 했다.

1962년에 열린 ‘군사혁명1주년 산업박람회’ 때의 모습 

문화공보부가 만들어지는 1968년을 전후해서 경복궁은 ‘민족의 얼’을 살리는 교육공간적 성격이 부가됐다. 경복궁에 광화문, 영추문 등이 복원되고, 국립박물관, 한국민속박물관 등 박물관이 다시 집중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변화에 새로운 것들이 덧붙여지는 양상이 계속 중첩되면서 경복궁은 중앙청, 박물관, 공원, 문화재, 군사시설 등이 누더기처럼 착종돼 있는 혼돈의 공간이 돼갔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경복궁에서 행정부가 떠나고, 1990년대에 들어 구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군사시설이 이동하고, 복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동안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경복궁이라는 장소가 가진 기억의 흔적들을 지우는 작업 역시 또 다른 활용은 아닐까 싶다. 경복궁은 한국의 어느 공간보다도 시대와 함께 변천하고 시대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소라는 점에서, 또한 중건 이후에는 경복궁의 주인이 주로 당시의 최고 권력이었다는 점에서 시대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경복궁의 ‘복원’과 활용은 과거의 복제를 넘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온 경복궁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지향을 찾는 노력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논문으로 「일제강점 이후 경복궁의 毁撒과 ‘活用’(1910~현재)」등이 있고, 저서로『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009, 동북아역사재단)(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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