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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학문론 서로 토론하면 우리 학문 발전하지 않을까요?”
“다양한 학문론 서로 토론하면 우리 학문 발전하지 않을까요?”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6.19 14: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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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학문론』 펴낸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

 

학문정책요? 학자들이 논문쓰기에 골몰해 학문의 본령인 비판적 사유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렇게 만든 게 이 나라 학문정책이라면 정책이죠. 자기 생각과 언어로 학문을 해야 하는데, 남의 것을 말하게끔 하는 풍토가 너무 만연해있어요. 이렇게 되면 학문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40년 학문생활을 정리해 『학문론』(지식산업사, 2012.4)이란 ‘기본의 기본’으로 돌아온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73세, 국문학·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의 一聲이다. 그의 이 말 속에 어쩌면 그가 ‘학문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엿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학문론』은 서울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뒤, 계명대, 울산대 등에서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진행한 ‘공개강의’와 저술을 바탕으로 했다. ‘학문론’은 책의 절반이 채 되지 않지만, 학자가 자신의 학문관, 학문정책, 학문의 길 등을 명료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그는 40년을 “학자는 저술로 말한다”라는 아포리즘을 고수해왔다.

그 흔한 보직 하나 하지 않았으며, 학회장도 맡지 않았다. 구비문학에서 시작한 그의 학문 인생은 한국문학과 철학, 세계문학, 문명, 학문정책과 제도 등에 걸치면서 진화해왔다. 그것은 모두 ‘학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그가 자주 말하던 ‘생극론’과 ‘변증법’ 그대로 자신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 교수는 지난 40여년의 학자로 살아온 인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돌아보면 누구나 아쉽고 후회되는 게 많을 터인데, 그는 “전혀 아쉬운 게 없다. 그때그때 해야 할 일들을 충실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알려진 것처럼 불문학에서 출발, 국문학으로 돌아선 학자다. 그간 『문학연구방법론』, 『한국문학통사(전5권)』,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등 굵직한 저서가 70여 편, 「동아시아 근대문학 형성과정 비교고찰」 등 논문 200여 편을 발표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마저도 “반성한다”라고 말했다.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논의를 전개해 혼란을 준 것”이 미안해서다.

그러면서 『학문론』은 앞선 저작들의 정수를 모아, 아주 쉬운 언어로 깊은 뜻을 정리한 책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70대 초반이지만, 그는 여전히 젊고 건강해보였다. 뭔가 더 내놓을 계획이 있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그는 그림 그리는 일, 강의와 원고 집필 이외에는 다른 계획이 없었다. 책을 더 낼 계획도 없다. 2년 전, 화가인 아내와 함께 인사동 조형 갤러리에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때 스무 점의 작품을 내걸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인생의 길을 자신의 뜻과는 다른 방향에서 걸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국문학자. 그는 지금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그림’앞으로 다시 돌아와 섰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아이디어에 주목한 한 민간 재단이 곧 인문학문(조 교수의 표현 그대로) 신진 연구자를 파격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를 구체화할 예정이다. 조 교수는 지금 그 일에 깊게 연관돼 있다. 비록 대학 현장에서는 물러났지만, 그가 오랫동안 제기하고 주장해온 생각과 주장들이 하나둘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른 더위가 사방을 에워싼 12일 산본에서 그를 만났다.

대담·사진 최익현 편집국장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 올해 73세. 정리할 시점으로 느낀 듯합니다. ‘학문론’을 제시한 것은 늦었지만 무척 반갑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동지이면서 적수인 여러 창조자가 자기 학문론을 내놓고 커다란 논란을 벌이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머리말에 적었습니다. 73세에 학문론을 들고 나온 이유를 짧게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학문론에 일종의 경합 같은, 논쟁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70대 초반이, 40여년 학문을 하면서 겪고 깨달은 바를 가다듬어 학문론을 정립하기에 적합한 시기입니다. 더 늦으면 힘이 모자라고 긴장이 풀려 추수를 못 할 염려가 있어요. 저와 비슷한 경험 가진 분들, 젊은 분들도 마찬가지지요. 자기 학문론을 정리해서 내놓아 커다란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 개의 다양한 학문론을 놓고 토론하면 우리 학문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가져봅니다.”


△ 지금까지 70여 권의 저서, 2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셨습니다. “논저를 너무 많이 낸 것을 반성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복잡하고 어려운 논의를 전개해 혼선을 빚었기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무엇을, 왜 반성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반성이 ‘학문론’의 구상과도 어떤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내 놓은 게 너무 많아요. 공부하는 사람이 다 읽기 너무 부담스럽지... 한창 작업할 때 무슨 말을 들었냐면 다 읽기도 전에 다음 책이 나온다는 얘기에요(웃음). 그 내용이나 논지에는 전혀 후회가 없지만, 제가 작업을 성글게 하는 편이라 오자도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출판사들이 오탈자를 말끔히 다듬어주지 못했죠. 대단히 미안하고 죄스러워요. 다행히 이번 책은 출판사에서 40여 곳 오탈자를 발견해서 전량 폐간하고 다시 출간했다고 합니다. 물론 안목 있는 독자라면 이게 틀렸다는 걸 알고 보겠지만요. 너무 많이 쓰고 틀리게 쓴 것을 어떻게 속죄 할 것인가. 그걸 이번 학문론으로 사죄를 하고자 합니다.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읽기 쉽게 간추린 이번 학문론으로 사죄를 하는 거죠. 내 학문에 대해 관심을 가진 독자들은, 이번 책을 시작점으로 거슬러 읽어 올라가면 되요. 처음부터 읽어 내려오면 지칩니다. 너무 많은 일거리를 준 것을 이번 기회에 반성한다는 의미에요.”

△ 수많은 저서 중에도 특별히 애착이 가는 저서가 있으신지요?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문학연구방법』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나네요. 그리고 가장 많은 품을 들인 책은 『한국문학통사』입니다. 학문연구의 꼭지점을 올린 성과로 말할 수 있는 책은 『소설의 사회사비교론』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꼽아볼 수 있겠습니다.”

△ 선생님의 연구사별 시기가 축약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정확한 지적입니다. 초기, 중기, 말기로 보시면 됩니다.”

△ 『학문론』 후속으로 구상중인 책이 있으신지요?
“내 스스로는 없어요. 만약 학문론 관련한 강의나 학회 요청이 오면 모를까. 가령 대구에서 학회가 있을 예정이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올 가을에 발표를 요청받았습니다. 「한국학의 전통과 혁신」을 주제로 발표할 예정인데, 이 원고들로 학문론 증보판을 낼까 생각중이에요. 다른 저작은 더 계획하지 않습니다. 『학문론』이 제 학문생활의 결론이고 마무리입니다.”

△ 만약 학문공동체가 선생님 학문론으로 생산적 대화, 수용한다면 좋을텐데요.
“경기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12월초에 『학문론』에 대한 토론회가 열려요. 국문학자 두 명, 역사학자 한 명, 철학자 한 명이 논평하고 토론할 예정인데, 저자로서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게 굉장히 즐거운 일이죠. 게다가 다들 50대 초반 학자들이에요. 동참하는 학자들이 생겨서 참 좋습니다.

△ 본문에 보면, “학문론을 특정 학과로 미루지 말고 공통과목으로 삼아야 대학의 수준이 향상된다”라고 지적하셨더군요. ‘학문론’을 하나의 과목으로 정규 커리큘럼에 포함하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어딜 가도 주장하는 게 그거에요.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라면 당연한 거죠. 물론 개별학문이야 다 스스로 하지만, 경계를 넘어 전체 학문을 보는 눈을 가져야하니까요. 인문, 사회, 자연계 전공자가 자기 학문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타자의 견해도 문제 삼고, 학생들과 함께 참여, 토론하면 학문을 쇄신하는데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확신합니다. 울산대에서 제안이 와서 강연을 하겠다고 했는데, 아직 실행은 안 되고 있죠. 안타까운 것은 학문론을 강의할 사람이 기존 교수 중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문론 한 과목 강의하면 3과목 강의하는 걸로 쳐주자는 제안도 했죠. 그런데 교수 중에 지원자가 없어요. 차라리 대학더러 ‘학문론’하는 교수를 공채하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머지않은 미래에 분명 그런 대학이 생길 겁니다. 동서고금 학문론을 섭렵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될 거고, 그래서 우리학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유럽보다 앞서서 선진국을 넘어서는 시대가 오겠죠. 따라잡는 시대가 아니에요. 아무리 잘 따라가 봐야 2등 아닌가요. 지금 세계화시대는 1등과 꼴찌뿐인 시대잖아요. 그런데 2등 설자리가 어디 있나요. 우리 학문이 유럽을 넘어서는 길이 어디 있을까. 그건 학문론 같은 작업을 본격적으로 배우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볼게요. 유럽학문은 학문을 분과학문으로 나눈다는 획기적인 전환으로, 찬란한 한 시대를 열었죠. 정치학, 경제학 등등 많아요. 철학마저도 고유한 대상과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다가 망하긴 했지만요. 우리가 유럽분과학문을 받아들이고 그걸 따라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넘어서는 건 불가능하죠. 동아시아 학문, 한국학문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전체학문으로 가야 합니다. 학문 통합론으로 갈 수 있을 때 넘어서는 게 가능해요. 그게  지름길입니다. 그것이 근대를 넘어서 다음시대 학문을 개척하는 길이요, 강의도, 대학도 바뀌는 길입니다”

△ 그것이 현재 대학생들에게 현실적으로 어떻게 적용이 될까요?
“교양과목은 현관인가요, 거실인가요? 우린 현관을 통해서 방으로 들어가죠. 거실은 항상 공동 영역입니다. 지금까지의 교양과목은 현관 역할이었어요. 하지만 본래의 교양은 거실입니다. 학부 1학년생부터 대학원생까지 학문론이 자기 연구 분야와 어떤 영향을 가지는지 생각해봐야겠죠. 남이 했던 것 따라가는 게 아니라요. 뒤떨어졌으니 남 따라가는 게 아니라, 뒤떨어졌으니 지름길로 가야 하는 겁니다. 제가 자주 드는 예가 있습니다. 고대에도 뒤쳐졌던 곳에서 중세를 먼저 열었죠. 고대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나 페르시아 바빌론에 비해서 뒤떨어졌었죠. 그렇기에 만인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이슬람이 생길 수가 있었고, 누구보다 먼저 중세를 열었습니다. 시대가 크게 변할 때는 후진이 선진이 되는 대 전환이 일어나요. 그냥 미개할 정도의 후진이라면 당연히 전환이 안 되겠죠. 축적된 부분이 필요합니다. 동아시아나 한국이 바로 그런 곳이에요. 우리가 2등일 수 있는 것은 축적된 역량 덕뿐이죠. 이젠 따라가기가 아니라 뒤집기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유럽 문명과 학문을 그동안 공부, 섭취한 것이 있기에 뒤집기가 가능하다고 봐요. 우린 그들의 강점, 약점을 다 알거든요. 한 문명권만 연구하는 사람들은 무식한 거예요. 이제 역전은 불가피합니다. 『소설의 사회사비교론』이 바로 뒤집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에요. 유럽 소설들, 한국 소설, 아프리카 소설의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보면서 어떻게 후진이 선진 되는가를 본격적으로 다뤘거든요.”

△ 선생님이 갖고 계신 ‘학문’에 관한 생각들은, 교육개혁에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학문정책이 버려져 있기 때문에, 교육개혁이 제대로 될 수 없다는 말씀도 있고요. 추상적인 서술을 하셔서,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유럽 근대학문의 전례에 따라 분야를 나누기를 능사로 삼는 학문을 넘어서서 동아시아의 전통을 이어받아 분야를 합치고 넘어서는 학문으로 나아가야 다음 시대 창조를 선도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겠죠. 그 다음에 이에 따라서 학문 정책을 세우고 대학을 개편해야 합니다. 전공을 합치고 나누는 거 둘 다 장점이 있어요. 누구는 학문론을 전공하고, 누구는 인문학을, 누구는 한국고대사를 전공할 수 있죠. 그러나 종합적인 전공과 세부적인 전공이 병행해서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지금은 합치면서 자기전공을 세분화하는 것, 즉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학문세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이것이 구체적인 학문 개혁이죠. 지금은 그런 총론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없어요.
또 철학이야기지만... 원래 철학이 총론이었어요. 그런데 유럽에서 모든 학문이 독립하니까, 철학도 분과학문 되려고 하니 지나치게 난해해지고 공감을 상실한 거죠. 이제 철학은 학문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대안을 창출해야 합니다. 한국문학전공자가 철학으로 학문론에 살을 더 붙인다면 좋은 것처럼 말이죠. 철학이 선두에 나서서 통합해가야 해요. 철학이 개별학문 행세하는 것은 자살행위에요.“

△ 외람되지만, 일부 젊은 학자들은, 선생님의 학문론 내용이 20년간 되풀이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적은 두 가지 생각을 더듬게 합니다. 하나는, 하나의 사유와 주장이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되고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게 된 환경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도대체 '조동일 선생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일종의 '공명현상 부재' 즉 학문 공동체 내부의 '대화 부재'입니다.
 앞선 제 20년은 전공분야에 대한 연구의 시간이었어요. 그 후 20년은 학문론을 여럿이서 하기 위한 시기였죠. 학문론을 위한 노력은 20년이 너무 짧아 아쉬운 바가 많아요. 여럿이 함께 하는 항구적인 작업이 정착해야 해요. 동참자들을 구한다는 말을 거듭 해서 동어반복으로 들릴 수 있었겠죠. 계명대에 있으면서 『이 땅에서 학문하기』, 『세계지방학시대』 등 10여권의 책을 냈죠. 역시나 반응이 없더군요. 불필요한 서론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학문론에 대해 각론을 준비하고, 단계별 논의 준비를 했던, 개인적으로는 본격적인 진전이 있던 시기에요.
저는 동어반복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선수끼리 시합하자. 관중과 선수의 시합은 시합이 아니라고요. 학자라는 사람이 관중처럼 삿대질하면서 논평하는 건 시합이 아니죠. 선수라면 무조건 나가서 일루타를 쳐야 하는 거고요. 관중의 입장으로 박수나 야유를 하는 것은 시합이 아닙니다. 대응되는 이론이 있어야 선수끼리의 시합인거죠. 그게 되면, 조동일은 어떻게 1루타를 쳤는가? 조동일은 어떻게 1루타밖에 못 쳤는가를 연구할 수 있을 겁니다."

△ 예전에 학회에서 비약이 심하다던가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질문을 받으시면 “혹시 그 책 읽어보고 얘기하는 겁니까?”라고 대답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관중도 좀 수준이 높아야죠. 그런 수준 낮은 관중이 교수 행세를 하고 있으니... 예전 세대들은 왜 학자가 자기 이야길 하느냐, 없는 이야길 하느냐고 무시했어요. 남이 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거죠. 비근한 예를 들어볼까요. 정부에서 돈을 많이 대서 인문학 석학강좌를 합니다. 거기 나오는 석학들도 남들이 했던 말만 해야 하는 줄로 알아요. 『학문의 정책과 제도』에 자세히 쓴 이야긴데요, 프랑스에는 꼴레쥬 드 프랑스라는 연구대학이 있습니다. 거기서 공개강의를 하면 청중 대부분이 교수에요. 살아있는 강의가 되는 거죠. 지금 석학인문강좌가 시민강좌랑 다른 게 뭐가 있나요? 계명대에서 공개강의 할 때, 청중 중에 교수가 10명이 안 되면 실패라고 얘기했어요. 시민교양강좌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나라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낭비가 있겠지만, 현직교수가 대다수의 청중이 되지 않는 한 앞으로 ‘석학’이랑 ‘인문학’이란 말은 빼줬으면 좋겠어요.”

△ 이번 출간하신 책『학문론』의 제1부는 정말 쉬운 언어로 구성돼 있습니다. 사용된 언어적 표현이 쉽다고 해서 책의 내용까지 쉬운 것은 아닙니다만, 실제 울산대, 제주대 공개강의가 바탕이 된 것 같습니다. 두 차례 학생, 교수와의 공개적인 토론에서 얻은 수확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이 책을 구상하고 집필하시면, 지금 변화하고 있는 환경, 즉 지식사회라는 기반 변화는 어느 정도 반영하셨는지요?

△ 이번 출간하신 책『학문론』의 제1부는 정말 쉬운 언어로 구성돼 있습니다. 사용된 언어적 표현이 쉽다고 해서 책의 내용까지 쉬운 것은 아닙니다만, 실제 울산대, 제주대 공개강의가 바탕이 된 것 같습니다. 두 차례 학생, 교수와의 공개적인 토론에서 얻은 수확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이 책을 구상하고 집필하시면, 지금 변화하고 있는 환경, 즉 지식사회라는 기반 변화는 어느 정도 반영하셨는지요?

“말이 어렵고 뜻이 얕은 글을 버리고 말은 쉽고 뜻이 깊은 글을 쓰기까지 연륜이 필요했습니다. 울산대학교에서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어 구상을 실행하, 여러 분야 학생들과 광범위한 토론을 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죠. 말이 쉽기에 전공 불문하고 학부 1,2학년 학생도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강의 내용이었지만 뜻이 깊기에 제주대에서는 대상이 교수와 박사과정 학생들이었어요.
우리나라 학문은 남의 말을 옮기는 것이죠. 그 원천에 대해 알아야 하고 전달자로의 위세를 자기가 누리는 겁니다. 영어강의를 예로 들어봅시다. 영어는 머리는 있어도 가슴은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얘기를 전달하는 것 밖에 안 되겠지요. 대학의 학문이 생산이라면 머리와 가슴이 다 있어야 합니다. 울산대에서 한 학생에게 “학문은 머리로 하는가, 가슴으로 하는가”라는 질문 덕분에 내가 깨어질 수 있었어요. 학문은 둘 다 있어야 합니다.”

 △ 선생님께서는 오늘날 학문이 잘못 되고 있는 것은 외부 간섭 탓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학문 공동체의 문제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사명감’, ‘문제의식’ 부재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학문이 잘 되는 길이 ‘사명감’, ‘문제의식’ 여부에 좌우될 수 있을까요? ‘학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부분을 보면, 결국 연구자, 학자의 ‘깨달음’, ‘각성’, ‘통찰’이 중요하게 환기되고 있습니다.
“왜 학문을 합니까? 즐겁기 때문이에요. 사명감과 문제의식을 불태우는 학문을 하면 정말 즐겁습니다. 학문을 생업이나 수단으로, 지식이나 기술로 여기는 풍조가 문명의 위기를 가중시키는 거죠.  명성이 나면 더 알려지고 싶고, 돈 벌면 더 벌고 싶고... 그런 건 채워지지 않아요. 학문은 세상을 구하고 역사를 바로잡은 지혜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벗어나 세상을 만드는 설계도가 돼야 해요. 예전 종교지도자들 깨달은 사람들, 탁월한 정치지도자들이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치인들, 종교인들 요즘 인기인으로 지내 사람만 만나며 다니는데, 어찌 설계도를 만들겠나. 이젠 학문하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보상이 있냐고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죠. 내 설계도가 받아들여진다면 다행인 겁니다. 진실로 학문을 한다면 천천히라도 받아들여지게 돼있어요. 인문학강좌도 변질됐지만 제가 예전에 주장하던 대로 조금씩 바뀌어가잖아요. 학문하는 사람 말고는 할 사람이 없어요. 나침반 없이 배를 타고 가는 겁니다. 배타고 와글와글한데 아무도 망원경 보는 사람 없는 거에요.”

△ 미국 행정부가 출범하면 대통령 뒤에 노벨상 수상자들이 병풍처럼 서있습니다. 어수선한 시절에 학자가 나랏일 하는 것, 학식으로 나라를 부강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학자입니다. 그러나 관직을 맡는 순간부터 학자임을 포기해야죠. 학문은 입산수도하는 것처럼 조용히 하는 겁니다. 처자식과 함께 입산수도해야 하니 더 어렵죠. 학식보다도 자기 학문의 성과를 이루고, 책을 써서 제안하는 것이 맞는다고 봐요. 저는 책을 썼습니다. 제가 그 자리를 맡아도 권한이 너무 적고 너무 바쁘기 때문에 실현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알죠. 조용한 시간에 학자는 설계도만 만들면 되요. 학자들 스스로가 설계도 안 만들면서 사다가 쓰자고 합니다. 지금은 사다 쓸 단계가 아니에요. 어디 베껴먹을 설계도도 없고, 맞지도 않아요. 책 쓰는 사람이 학자입니다. 교육정책이 잘못됐다고 삿대질하는 학자는 많지만 어떻게 해야 한다고 책 쓴 사람이 없다. 칼럼, 10~20분이면 읽을 글만 쓰는데 학자의 직무유기죠. 농사꾼이 농사 안 짓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학자가 설계도를 만들려면 필요한 절대적 조건이 바로 시간이에요. 『학문의 정책과 제도』에 서 독일 막스 플랑크연구소, 프랑스 CNRS 사례 등 외국 것들 조사해서 쓴 부분들만 해도 노동량, 시간이 얼마나 들었는지 보세요. 독일어, 불어 원전 읽어가면서 했어요. 현직교수는 그만한 시간을 못 내죠. 세상이 바쁘게 학자를 합니다만, 투쟁해야죠. 자기의 시간을 확보하는 투쟁을 해서 결과를 내야해해요.
학문론 보면 이거 품 별로 안 들었네, 뭐 하루 저녁이면 쓰겠네 하는 분도 계시겠죠. 그건 앞의 글을 읽어보지 않았을 때 할 수 있는 말이에요. 학문의 본령, 설계도를 만드는 일을 하려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것이 학문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흥미롭게도 선생님께서 ‘이성 위에 통찰’을 학문을 향상하는 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통’이란 단어가 요즘 널리 사용되고 있는 ‘융합’, ‘통섭’을 연상하기도 합니다. 통찰이 학문에서 중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통찰은 또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인지요? ‘頓悟’를 강조하신 연장선에 이 ‘통찰’이 있는 것 같습니다.
“통찰은 꼭짓점 올리기이고, 융합, 통합, 통섭 등은 밑면 넓히기입니다. 꼭짓점 올리기는 頓悟이고, 밑면 넓히기는 漸修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밑면 넓히기에 관해서는 관심이 많으면서, 꼭짓점 올리기는 바라지 않는 것이 잘못입니다. 밑면 넓히기는 꼭짓점 올리기 상관관계가 있어요. 밑면 넓히기는 별별 것을 받아들여 확장이 쉽지만 꼭짓점 올리기는 어려워요. 이게 바로 통찰입니다. 이성과 감성이 다 합쳐진 것이죠. 과거에는 종교의 소관이었지만 이론과 실체가 합쳐져야 하는 학문의 소관입니다. 『학문론』, 『학문에 대한 동아시아 문명론』,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이 통찰과 관련된 저서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통찰과 생극에 대한 책을 따로 쓰는 것이 서양적인 사고방식이에요. 별도로 쓰면 개념화되고, 어려워지고, 결국 말의 유희가 되죠. 그러니까 그런 철학적 발상이 대상 속에 내재화해있는 상태로 말하는 게 낫죠. 그러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거죠. 유럽 철학사도 18세기 볼테르가 인간사 속에서 철학 얘기하고 희곡을 집필했는데 칸트 이후로 많이 분리됐죠. 문학은 적게 손해보고 철학은 많이 손해 봤어요. 자기 폐쇄성이 극에 달하고 있는 철학은 이제  인간만사 속으로 들어와야 해요. 독일식 순수철학은 망했고 프랑스식 잡종철학은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죠. 생극론, 통찰론 따로 쓰면 그건 철학의 자살골을 돕는 일이에요.”

△ 통찰을 기르거나 정치하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시죠.
“학문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합쳐지면, 사유와 행동이 일치하게 됩니다. 이 때, 역동적이고 실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순수히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합쳐질 때 가능한 일이죠. 분리되면 통찰이 될 수 없어요. 생명체가 아닌 겁니다.”

△ 책의 주제와 연결된 문제를 여쭙고 싶습니다. 박사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구재단으로 이관된 이 나라 학술정책(학문 정책이 아니고 학술정책)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박사가 넘쳐난다는 주장도, 모자란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 공감하고 있는 것은, ‘대학원 교육’에 큰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 부분입니다. 학술정책도 교수도, 박사를 마친 젊은 연구자도 모두 불만스러워합니다. 대학은 업적평가를 강화했고, 교수들이나 연구자들은 ‘논문’ 쓰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박사 수 줄인다고 질이 향상된다고 착각하면 안 되요. 우리가 박사 수를 줄이면 수입되는 박사 수가 더 많아지니 의미가 없겠죠. 전 국민이 박사가 되도 괜찮아요. 전 세계에 공급하면 되니까요. 문제는 수준 낮은 박사에요. 대학원 강화조치로 박사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봅니까? 아니에요. 학문수준의 문제에요. 교수가 되고 나서는 더 문제입니다. 시간이 없어요. 연구하도록 뒷받침을 해줘야 하는데... 연구교수, 연구원 자리를 줘야 해요.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감당할까. 뜻하는 바가 간절하면 됩니다. 민간 재단에 제가 제안한 프로젝트가 다음 달이면 시작 되요. 박사 후 연구원이 창의적인 것을 개발하겠다고 하면, 5년간 지원을 해주는 거죠. 연봉 3600만원과 5000만원 사이에서 공방 중인데요, 3600만원으로 정하면 연구 이외의 자문료 비싸게 받고, 5000만원이면 자문료 비롯한 다른 것들 무료로 해주라고 제가 주장하고 있어요. 정부가 아니라 개인재단에서 하는 겁니다. 구상만 가지고 시작하고, 중간에 구두발표 하는 거죠. 이렇게 학자들에게 자율성을 줘야 해요. 논문을 쓰는 의무도 폐지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연구에 대한 열망이 큰 사람은 연구소로 옮기는 게 맞고...
『학문의 정책과 제도』에 프랑스 국립과학연구단체(CNRS)와 독일의 막스 플랑크연구소의 사례를 썼어요. 공동연구와 개인연구가 같이 가는 우리나라의 경우, 서로 의지하고 경쟁하고 견제할 수 있어요. 하나의 공동체로 가는 것이 최소의 경비로 가장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거죠. 일반 교수들은 논문 내지 않도록 해야 하고, 연구업적도 읽도록 해야죠. 강의교수 아홉 명에 연구교수 한 명 정도가 좋은 비율이에요. 5년 후에 연구결과를 검증합니다. 그럼 어떻게 놀겠습니까. 그래도 정말 진정한 연구는 제목도 못 쓰고 개요도 작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옵니다. 결과만 보이는 거죠. 연구구상이라는 에세이만 써내면 되도록 이 민간재단이 실시할 예정입니다. 심사위원도 기명으로 하려고요. 익명으로 밀실에서 하잖아요. 심사위원이 이해할 정도로 글을 쓰면 별로 연구가치 없는 거라고 생각하죠. 밀실에서 하는 것 심사위원의 질이 항상 낮다. 심사위원이 이해할 정도로 글을 쓰면 별로 연구가치 없는 거 아닌가요(웃음).”

△ 교수들이 업적소화를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질이 중요한데. 함정이 된 거죠. 질적으로 중간 평준화가 됐어요. B학점 일색이다. A학점 수준이면 학회심사에 떨어지니까(웃음). ‘심사위원의 보수성’과 ‘저질’ 때문이죠. 그러면 왜 이런 제도를 만들었을까. 결국 정부가 교수의 약점을 잡으려고 만든 거예요. 연구 결과 제때 못 내고도 연구비 받으면 약점으로 가지고 있다가 정부 비판을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죠. 진짜 연구향상을 만들기 위한 제도가 아닌 거죠. 거의 모든 교수가 다 약점이 잡혀 있어요. 저는 한 번도 기간을 어긴 적도, 제목을 바꾼 적도 없으니 이렇게 떠들 수 있습니다(웃음). 그리고 재직 중인 교수들은 말 못해요. 한 번은 학진 이사장이랑 공개적으로 논쟁했는데, 내가 진행하는 3인 공동연구가 1단계에서 바로 종료됐어요. 약점이 없다 해도 시비 걸면 반드시 불이익이 오게 돼 있고요.”

△ 선생님께서는 정년퇴임을 하셨지만, ‘은퇴’는 아직도 먼 일 같게 보입니다. 퇴임 이후, 가장 공들이고 계신 일은 무엇입니까? 퇴임 이후에도 ‘학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학자 조동일’ 말고, ‘자연인 조동일’ 이런 구분에 동의하실 수 있습니까? ‘퇴임’후에 혹 대학이나 교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이 조금 바뀐 부분은 없으신지요?정년 후 작업의 분량을 단계적으로 줄여 마무리를 하니 짐이 가벼워집니다. 대신 그 깊이를 더하죠. 여러 번 생각하고 고칩니다. 물리적 부담은 줄이고요. 나로서는 해방감,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에요. 오래 접어둔 소원인 그림으로 새로운 즐거움도 있고요. 아쉬운 거 하나도 없습니다. 매 시기마다 할 일을 다 했거든요. 이제는 덤으로 하는 거죠.

 △ 학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젊은 학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요?
요즘은 교수들이 작업관리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안하는 것 같아요. 나는 다 계산대로 글을 썼어요. 정년 후에도 큰 일 하겠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럴수록 더 노쇠해지죠. 욕심을 줄여야 해요. 하는 일이 질적으로 좋아지거든요. 현재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학문론』에 학문이 막히면 어떻게 하는가라는 대목이 있어요.  9개의 체크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그 부분을 잘 읽어서 이겨나가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계획생산을 해야지 주문생산하지는 않아야 하고, 시장의 인기에 영합해서 단명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해주고 싶습니다.
『한국소설의 이론』은 17년 만에 1만부가 넘었어요. 더 많이 나간 해도 더 적게 나간 해도 없습니다. 17년이 걸렸죠. 재주 있다는 사람들 많아요. 인기위주로 글 써서 재주를 망치는 사람들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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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 2012-06-22 07:11:06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맞습니다. '마르크스'도, '프랑크'도 아니지요.. 오자가 계속 반복되길래 답글 남겨 봅니다(댓글 영문 표기가 안 된다고 해서 한글로만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