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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의 엇갈린 표정 … ‘아프리카’에 쏠린 독자들의 시선
번역서의 엇갈린 표정 … ‘아프리카’에 쏠린 독자들의 시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6.19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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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편집자가 뽑은 문제작 ⑥ 한울 편

 

‘한울 아카데미’ 시리즈로 유명한 도서출판 한울(대표 김종수)은 올해로 출판사밥 32년이 되는 인문·사회과학 전문 중견 출판사다. 지금까지 3천여 종의 단행본을 내놓았다. 특히 ‘한울아카데미’ 시리즈는 사회과학, 인문학, 역사학부터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역을 포괄하면서 학계의 다양한 지적 추이를 반영해왔다. 이 때문에 한울은 “국내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리즈”라고 자부한다.

한울은 가장 공들여 제작했지만 저평가된 책으로 크리스 틸리와 찰스 틸리 父子가 함께 쓴 『자본주의의 노동세계』(이병훈 등 옮김, 2006)를, 기대와 달리 호응이 좋았던 책으로 이브 라코스트 등이 쓴 『마그레브, 북아프리카의 민족과 문명』(김정숙 옮김, 2011)을 꼽았다. 『자본주의의 노동세계』는 틸리 부자가 각자의 상이한 학문적인 배경과 관심사를 적절하게 결합시켜 근·현대를 넘나드는 역사적 분석과 생생한 현장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노동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책이다. 미국 대학생들조차 독해하기 쉽지 않다고 할 정도로 난해한 이 책의 번역은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과)의 주도하에 노동·산업사회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꼼꼼히 수행했다.

이 책은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임노동에 국한해 검토해온 기존 저술과는 달리 다양한 비시장적 노동, 예컨대 가사노동, 지하경제노동, 자원봉사활동 등을 포괄하는 분석의 틀을 제시한다. 또한 자본주의 노동세계의 변동과 변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즉, 자본주의 태동 시기에 존재했던 가내수공업부터 현대 대공장 노동에 이르기까지 노동의 사회적 조직형태와 특성이 변화해온 역사적인 궤적을 서술하고, 국가 간에 존재하는 상이한 노동체제들을 심층적으로 비교·검토한다.

이렇듯 이 책은 역사적 상상력, 비교사회적 상상력, 비판적 상상력을 종합적으로 활용해 자본주의 노동세계의 실태와 작동원리를 규명하고 있다. 급변하는 한국 노동현실을 체계적으로 조망·정리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과 경험적 분석방법들을 제시한 이 책의 학술적 가치는 2007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것으로도 증명됐다. 그러나 한울 편집자들은 “한국의 노동세계를 탐구하려는 연구자들이나 노동현실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한국의 노동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라는 우리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이 책이 기대에 못미친 까닭은 무엇일까.

한울의 김현대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돌아보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이 책에서 다뤄지는 주된 연구대상이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그 이론 체계와 경험적 분석결과를 우리 사회의 노동현실에 그대로 적용·해석하기에는 적절치 못했다. 또 상대적으로 난해한 학술이론서이기에 대학교 등에서 노동·산업사회학의 학습교재로서의 활용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뚝뚝한 표지가 자본주의 노동세계의 황량함을 너무 노골화한 것은 아니었는지….” 같은 번역서임에도 반응이 분명하게 갈렸다는 점에서, ‘번역서’가 출판시장에서 꼭 고전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한울의 책들은 잘 보여준다.

파리 제8대학 명예교수이자 역사 지리 잡지 〈헤로도토스〉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지정학자 이브 라코스트 등이 쓴 『마그레브, 북아프리카의 민족과 문명』이 그렇다. 이 책은 솔직히 ‘북아프리카 민주화 열풍’의 덕을 봤다고 할 수 있다. 편집자들은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의 총칭인 ‘마그레브’가 다소 생소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어 김정숙 배재대 교수(프랑스어문학과) 등 번역자들이 ‘마그레브연구소’에서 썩 달가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원서 제목에는 없는 ‘북아프리카’를 집어넣은 것이 주효했을 수도 있다”라고 살짝 귀띔해준다. 게다가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읽기 과제로 선정돼 소리 소문 없이 주문이 쇄도(?)한 것도 이 책의 독자층을 넓혀주었다는 후문이다. 다양한 정체성을 아우르는 마그레브는 섞임의 땅이다.

아프리카지만 흑인이 적은 지역이며, 로마를 비롯한 유럽 문명권의 역사를 지녔다. 식민지였던 과거로 인해 옛 종주국과 복합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유럽 여러 나라에 살고 있는 다수의 이민자와 관련돼 있다. 마그레브 문화의 복잡성과 풍부함은 이런 점에서 비롯된다.

정치·경제적으로는 중동에 속하며, 최근 반정부·민주화 시위로 흔들리고 있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다. 이 책은 그러한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을 소개하는 최초의 입문서라는 점, 그리고 마그레브와 유럽 출신 전문가들이 역사, 인류학, 언어와 문학 연구 등 마그레브 문명의 윤곽과 문화적 정체성의 구성 요소에 중점을 두고 집필한 개론서라는 점에서 국내에서는 드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대 팀장은 “그 가치를 알아본 눈 밝은 독자들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는 게 놀랍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눈 밝은 독자들이 출판문화를 풍요롭게 일궈나가는 동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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