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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의 법철학과 지금 이곳의 ‘철학의 빈곤’
200년 전의 법철학과 지금 이곳의 ‘철학의 빈곤’
  • 김도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법철학
  • 승인 2012.06.19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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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 칸트, 『윤리형이상학』(백종현 옮김, 아카넷, 2012.3)

칸트의 『윤리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이 백종현 교수의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출간됐다. 특히 제1편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이하 「법이론」) 번역이 국내 법학자들에게 갖는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필자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 『실천이성비판』, 기타 실천철학 에세이들을 읽은 후 「법이론」에 도전한 바 있다.

「법이론」의 공부과정에서 고생을 했기에 국역본을 보고는 얼마나 꼼꼼하고 정확하게 번역됐는지를 즉각 알아볼 수 있었다. 200여 년 전에 출간된 칸트의 「법이론」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 우리가 칸트의 「법이론」에서 배운다고 할 때 무엇을 배운다는 것일까. ‘분석적 마르크스주의(analytical marxism)’를 주도해온 옥스퍼드 정치철학자 제럴드 코헨(Gerald Cohen)이 말한 바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 현대 물리학자들이 갈릴레오나 뉴턴이 창시한 과학적 전통에 충실하되 그들의 테제들을 보존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적지 않은 부분을 부정하고 혁신하면서도 여전히 갈릴레오와 뉴턴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말할 수 있듯이, 물려받은 철학이론은 그 문제의식과 핵심적 사유방식, 포부와 가치에 충실하되 많은 부분이 혁신되고 재구성돼야 함을 코헨은 강조한다.

이는 칸트에게도 그대로 통용될 것이다. 당대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칸트가 논증한 것들 중 많은 부분은 거부돼야 하지만, 여전히 현재에도 수용돼 재구성돼야 할 내용들이 있다. 롤즈가 칸트의 핵심사상을 수용해 자신의 정의론으로 발전시킨 것은 그러한 태도의 전범이라 하겠다. 법의 제정과 집행 이끄는 보편적 법원칙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각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와 공존할 수 있음을 규정하는 법률에 따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법의 이념적 토대라고 말한 바 있다.

「법이론」에서 칸트는 이 근본사상 위에 서서 법의 제정과 집행을 이끄는 보편적 법원칙과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여준다. 칸트에 따르면, 각 개인이 자신의 선호와 가치관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면서도 상호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의 총체가 법이다. 그렇다면 법에 적용될 보편적 실천이성의 법칙은 무엇일까.“동시에 보편적 법칙으로서 타당할 수 있는 [너 자신의 행위]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는 보편적 윤리법칙이 법의 영역에서는 “너의 의사의 자유로운 사용이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보편적 法법칙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민 개인들의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될 때, 그것도 동등한 정도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될 때 보편적 실천이성의 법칙이 충족된다. 법학의 임무는 각 개인에게 보장된 자유의 공간이 최대한 평등하게 보장되도록 수학적인 엄밀성을 가지고서(“mit mathematischer Genauigkeit”) 정확하게 판단할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자유의 공존 조건 외에 법의 특성은 강제력에도 있으므로 법적 강제력의 도덕적 정당성을 논증하는 것도 법이론의 중요한 테마다. 칸트의 「법이론」은 사회계약론의 전통 위에 서 있지만 그 근본발상에서 선구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가령 홉스의 계약론 틀에서 국가는 ‘괴물’로서 인식되면서도 국가의 공적 강제력 행사가 정당화되는 것은 전쟁이 낳은 혼란과 공포로부터 안전과 생존을 도모하려는 개인들의 근본적 관심사(이해타산적 고려) 때문이다. 국가와 법의 강제력을 이런 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6·25 전쟁 과정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경험하고 심각한 빈곤과 공포를 뼈저리게 체험한 세대들은 국가와 법의 폭력을, 특히 1970년대의 유신체제를 암묵적으로 이렇게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당화 방식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칸트는 이와는 다른 정당화 방식을 취한다. 국가와 법의 강제력은 생존과 안전이라는 이해타산적 고려뿐만 아니라 인간존엄성의 핵심인 자유의 보장이라는 도덕적 고려에도 비춰 정당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개진되는 정의원칙들은 칸트의 보편적 法법칙을 현대 입헌민주주의 체제에 맞게 재구성하고 발전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자연법론을 수용하는 칸트는 실정법의 제정과 적용을 향도하고 규제하는 보편적 도덕원리들의 총체인 자연법의 원천을 “모든 타인의 자유와 보편적 법칙에 따라서 공존할 수 있는 한에서, 모든 인간에게 그가 인간이라는 바로 그 힘으로 귀속하는 유일하고 근원적인 권리”인 평등한 자유권에서 찾는다. 그리고 재산법, 계약법, 혼인법, 가족법, 헌법, 형법, 국제법의 기초를 이루는 이 근원적 자연법 규범이 각 법영역에서 어떤 내용으로 구체화되는지를 상론한다.

 이러한 칸트의 태도에서 ‘천박한’ 법실증주의와 ‘독선적’ 자연법론을 극복할 하나의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 법질서의 철학적 기초에 대한 성찰 『영구평화론』에서 칸트는 정의로운 헌법질서의 현실적 실현가능성을 논증하는 것은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설파한 바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정의로운 헌법을 구성하는 정확한 개념들과 원칙들을 추출한 후, 인류의 역사적 경험을 고려하면서 정의로운 헌법질서의 구체적 제도들을 제시하고, 정의로운 헌법의 원칙들과 제도들에 따라 행동할 용의가 있는 개인들의 선의지 존재를 해명하는 이론적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법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여겨진다.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도 자유의 보장보다는 제한에 주력하고 최대한의 평등한 자유가 아닌 특정 집단의 특정한 자유들의 보장에 더 관심을 두는 법집행당국이 보여주는 철학의 빈곤을 보노라면, 칸트가 「법이론」에서 수립하려고 했던 입헌주의 및 법치주의의 철학적 토대에 기대어서 한국 법질서의 철학적 기초를 다시 성찰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백종현 교수의 번역이 그런 철학적 성찰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김도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법철학
필자는 독일 킬(Kiel)대에서 롤즈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칸트의 법치주의: 법률, 법, 이성」, 『법철학』(공저) 등이 있다. 도덕철학, 정치철학의 이론을 법적 담론에 연결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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