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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신사의 거목’에 이르는 길, 문학과 철학의 소통 가능성 시사
‘현대정신사의 거목’에 이르는 길, 문학과 철학의 소통 가능성 시사
  • 김명인 인하대·국어교육과
  • 승인 2012.06.19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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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서평_ 철학자들의 김수영 읽기가 의미하는 것

김수영은 겨우 두어 평 남짓한 무덤에 묻혔을 뿐인데 4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의 무덤은 여전히 도굴중이다. 그의 무덤을 줄기차게 파헤쳐 온 사람들 중에는 이미 300~400편을 넘어섰을 그 수많은 연구논문과 평론을 써 온 문학판 사람들이 아닌 경우도 있다. 일종의 크로스오버라고나 할까,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이 도굴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재야 철학자’로 이름을 알려온 강신주가『김수영을 위하여』라는 4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을 펴냈다. 지난 2000년에는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가『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이라는 김수영에 대한 에세이집을 낸 바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철학자들이다. 강신주는 장자 연구로, 김상환은 데카르트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김수영을 테마로 해서 학위논문을 쓴 문학도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책을 낸 것도 아니므로 이 두 철학자는 말하자면 도굴꾼 치고도 전문 도굴꾼에 속하는 셈이다.

문학이 아무리 대중친화적인 분야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책을 쓰는 일, 특히 특정 작가나 시인의 세계에 대해 책 한 권을 만드는 일은 좀 다르다. 그것은 생각보다 아마추어나 딜레당뜨의 수준은 넘어서는 상당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수영 경우라면 기존의 연구나 비평적 성과가 워낙 많고 또 유명한 만큼 이미 관습화되고 상투화된 평가와 이미지들이 두텁게 형성돼 있기 때문에 독창적이고 주목할 만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나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아 더욱 그렇다. 그리고 대개 이런 경우 해당 전공의 고유한 전문성과 ‘영업권’(?)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분야의 종사자들은 대개 적당한 선에서 그 애호행위를 멈추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일반적 장애를 뚫고 이 두 철학자는 김수영이라는, 문학판에서도 일종의 ‘고급 과정’으로 치부돼온 존재를 대상으로 해 일종의 횡단적 글쓰기를 시도했고, 또 그 결과 만만치 않은 성과를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작업은 그들 각자의 내적 절실성 여부는 떠나서라도 거칠게 보아도 최소한 다음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우선 김수영이라는 대상에 자신들의내적 절실성과 철학적 내러티브에 호응하는 철학적 문제성이 있어야 할 것이며 둘째, 기존의 문학적 연구나 비평적 성과와 다른 독창성과 차별성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객관적 자료에 기초한 실증적 근거를 포함한 필요한 만큼의 과학성도 갖춰져야 할 것이다.

먼저 김수영의 어떤 점이 이들 두 철학자의 철학적 문제의식과 접속돼 마침내 책 한 권, 혹은 그 이상의 사유를 산출해 낸 것일까. 김수영은 낡은 서정주의와 투박한 현실주의, 그리고 공허한 주지주의 사이에서 정체돼 있던 전후 한국시를 세계사적 동시성의 수준으로 단번에 승격시킨 시인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근대 혹은 근대성에 대한 그의 치열한 탐색과 추구가 가로놓여 있는데 이것을 단지 시적 주제로만 다룬 것이 아니라, 시 형식을 포함한 ‘시적인 것’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였고, 동시에 그것을 자기 삶 전체의 주제로까지 확장시켰다는 데 그의 범연치 않은 독자성이 존재한다. 모더니티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그 극복에 대한 탐색이야말로 현대철학의 중심 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김수영은 그의 시와 삶 양면에서 공히 이러한 주제를 실천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 김수영의 시와 삶은 문학적 텍스트이면서 동시에 철학적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김상환에게 있어서 김수영은 특정한 철학적 주제를 매개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 혹은 존재론적 사유의 살아있는 실제를 보여주는 존재로 더 의미가 깊은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김수영은 칸트적·데카르트적 존재론의 시적 현현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시적 모험 혹은 기투를 통해 그 모더니즘적 제약을 넘어서는 미래적·가능적 존재로 그려지고 있
다. 반면에 강신주의 경우 김수영은 보다 구체적으로 특정한 철학적 주제와 관련을 맺는다. 강신주는 김수영의 초기 시「달나라의 장난」에서 발견한 ‘혼자서 돌기’라는 관념을 들뢰즈의 ‘단독성’개념으로 환치해 김수영의 시세계를 단독성의 구현이라는 일종의 포스트모던 기획과 적극적으로 연결시킨다. 김수영에게는 이처럼 이들의 철학적 문제의식에 호응하는 철학적 내러티브의 맹아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김상환과 강신주의 김수영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문학 쪽에서 이루어져 온 김수영 해석과 얼마나 다른가. 결론부터 말하면 같으면서 다르다. 문학 쪽에서도 김수영을 모더니티와의 관련 속에서 해석한 연구 성과는 적지 않다(졸저『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역시 근대성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김수영을 전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책이다). 다만 접근방법이나 개념틀에서 차이가 있고 김수영의 산문 속에서 명기돼 등장하는 하이데거의 경우를 제외하면 문학 쪽의 연구성과들은 김수영 문학의 철학적 연관을 적극적으로 구명하는 작업은 아무래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두 철학자들은 칸트, 데카르트, 니체, 들뢰즈 등을 적극적으로 호출해 김수영 해석에 동원함으로써 기존의 문학적 해석들을 확장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이 상호보완성은 다소간 일방적이다. 이 철학자들이 기존의 문학 쪽에서의 김수영 해석을 참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이라는 흔적은 찾기 힘들다(김상환의 경우는 문학 쪽으로부터
의 참조가 거의 보이지 않고 강신주의 경우는 참고문헌 목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크게 보자면 김수영을 가운데 두고 문학과 철학이 간학문적, 통섭적 소통을 하는 셈이다.

다만 두 분야의 접근법의 차이에서 낳는 해석의 차이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김수영 접근을 본격적인 철학연구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책에서 이른바 근대학문적 엄격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래도 자기 전공이 아닌 데서 오는 이완감이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이 이들로 하여금 굳이 문학 쪽에서의 기존의 해석들을 비판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참조하는 일로부터 자유롭게 해줬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은 이 두 개의 유의미한 작업의 딜레땅뜨적 성격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수영의 문학적 해석과 철학적 해석에는 방법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문학이 다루는 것은 구체적 인간과 세계의 형상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작가와 작품을 넓은 의미의 역사전기적 맥락 속에서 읽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넓게는 이른바 역사와 사회상황과의 관련을, 좁게는 생애 사실과 성격, 생활적 토대 등과의 관련, 그리고 연대기적
연관 등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두 철학자의 노작에는 이런 점들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데서 오는 해석의 평면성과 전기적 시대착오 등이 여러 군데서 노출된다(이 점은 텍스트에 더 집중하는 김상환의 관념편향적 작업에서 더 두드러지고, 비교적 전기적 사실 등의 컨텍스트를 중시한 강신주에게는 다소간 완화된다). 그리고 한 작품을 해석할 때에도 작품 전체의 맥락과는 다른 분절적 읽기, 의도
된 모호성에 대한 오해 등이 오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이 다루고 있는 김수영의 시 편수를 보면 김상환은 35편, 강신주는 34편이다. 김수영 해석에 결코 충분한 전체성과 입체성을 담보해 주기에는 너무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철학자의 김수영에 대한 나름의 절실하고 진지한 접근은 김수영이라는 한국현대정신사의 거목에 접근하는 두 개의 특별한 통로로서 자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철학적 접근은 그 자체로서‘김수영 정신’이 단지 문학판 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지식계 전체가 협업적으로 규명해내야 할 과제로서 여전히 현재적 생산성을 지닌다는것을 웅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김명인 인하대·국어교육과

 

인하대에서‘조연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했으며, 계간지<황해문화>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저서로『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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