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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정치와 명예
원로칼럼_ 정치와 명예
  •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현대시(국문학)
  • 승인 2012.06.18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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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현대시(예술원 회원)
학문이란 곧 성리학이요, 그 학습의 목적은 출사해 닦은 바 경륜을 세상에 널리 펼치는 것이 조선조 지식인, 즉 선비의 도리였다. 쉽게 말하자면 선비가 학문하는 목적은 과거에 급제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돼 사적으로는 부귀영화을 누리고 공적으로는 만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공통된 이상으로 삼았다. 오죽하면 입신양명을 효의 근본이라고까지 했을까. 그러한 관점에서 조선시대의 지식인이란 그 일로 그들이 성공을 했던, 실패를 했던, 아니라면 어떤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스스로 포기치 않을 수 없었던, 한마디로 정치인이거나, 정치 지망생이거나, 정치 낙오자들이라 할 수 있다. 온통 정치판인 것이다.

그 조선 500년이 배양한 선비의 유전인자가 고스란히 전수된 탓일까. 시대가 달라지고 가치관 역시 많이 변했다지만 오늘 우리 지식인의 자화상 역시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정치란 한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만은 아닐 것임으로 국민 개개인 누구나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에 따라 그 주체가 되거나 이에 참여할 자격이 있을 터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재력을 갖췄다고 해서 다음 단계로 국회의원이 돼야만,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 혹은 학계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해서 다음 차례로 정치권력을 손에 쥐어야만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오늘의 선비집단이라 할 대학 사회에 알게 모르게 만연해 있는 일부 교수들의 정치 지향의식이다. 대학교수로서 어느 정도 사회적 지명도를 갖게 됐으니 이제는 이를 발판으로 정계에 뛰어들어 정치권력을 가져야겠다는(학문하는 일 그 자체로서는 성에 차지 않는) 현대판 ‘입신양명’의 가치관이다. 정치와 무관한, 가령 생물학이나 영문학을 전공으로 하는 교수 역시 경우는 마찬가지다. 교수를 했음으로(물론 이를 건너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 선에서 학문은 제쳐둔 채 이제는 학장을 해야 하고, 학장을 했으니 총장을 해야 하고, 총장을 했으니 장관이나 총리 혹은 대통령을 해야겠다는 그 큰 꿈(?) 속에 사는 사람들, 이들을 과연 진정한 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사람들일수록 학문보다는 정가나 정권에 줄을 대는 데 힘을 쏟고, 정치권력자 주위에 맴돌며 어느 참모 그룹에 끼어볼까, 어느 선거캠프에서 불러주나 목을 매고 기다리는 것을 우리는 오늘의 우리 대학 사회에서 너무도 흔히 본다.

몇 년 전인가 대통령이 되신 분이다. 후보 시절 어느 재벌의 총수가 선거에 뛰어들어 당신과 라이벌이 되자 돈이나 명예 둘 중 하나만을 가져야지 이 모두를 가지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갈한 적이 있었다. 이 분은 아마도 정치행위 그 자체를 명예로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많은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인도 명예를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령 기업인이나 노동자나 군인이나 미화원이 특별한 경우에 명예를 가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어떤 일을 하든 그것으로 인간 삶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데 공헌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 명예로운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인인 까닭에 그 곧 명예로운 사람이 아닌 것과 같이 정치인인 까닭에 그 곧 명예는 아니다.

사실로 말하자면 정치의 속성은 권력에 있으며, 기업인의 속성은 부, 즉 재력에 있다. 그러므로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경우 윗분의 말씀은 돈이나 권력 둘 중 하나만을 가져야지 이 모두를 갖는 것은 안 된다고 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수는 어느 쪽에 해당되는 사람들일까. 정치인이 권력에, 기업인이 재력에 그 속성을 둔다면 교수는 아무래도 명예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그 분야에 성공을 거둬도 학문하는 일로 권력과 재력을 살 수는 없을 터인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그 한 가지 일로 일평생을 매진한다는 것은 결국 명예를 얻는 것 이외 어디 다른 보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교수는 한마디로 권력이나 재력이 아니라 명예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라 하겠다.  그래서 ‘명예’라는 단어에는 ‘권력’이나 ‘재력’처럼 힘을 뜻하는 ‘力’자가 붙지 않는 것이다. 혹시 정치권력을 지향하는 교수들은 정치를 명예로 착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정치판에선 벌써 대선(대통령 선거)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몇 달 전 총선에서도 이미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지만 이 회오리바람이 어떻게 대학가에 몰아칠지 우려 되는 바 적지 않다.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현대시(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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