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01:10 (목)
『춘추』, 빈사상태의 제국 구할 임무를 떠맡다
『춘추』, 빈사상태의 제국 구할 임무를 떠맡다
  •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 승인 2012.06.14 10: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⑦ 시대의 부름을 받은 고전들(동양편)

성리학의 시대가 펼쳐지기 전, 유가의 경전은 五經으로 대표됐다. 四書는, 불교에 맞설 수 있도록 기존의 유학을 개조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로이 구축된 성리학적 경전의 체계였다. 한대에는 오경박사제도만 있었고, 당대에는 천자의 권위가 서린 『五經正義』만 있었다. 사서가 오경을 제치고 유가 경전의 지존이 된 것은 원대에 들어 성리학이 체제교학으로 채택된 이후의 일이었다.

오경 가운데는 『춘추』라는 책이 있다. 춘추시대의 역사를 연도순으로 정리한 역사서로, 공자가 편찬했다고 해서 매우 중시됐던 경전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 수록된 문장은 메모에 가까웠다. 사건 발생 시간과 장소, 관련 인물 등이 소략하게 언급된 정도였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원년 봄 주나라 왕의 정월이다. 3월, 공이 주나라의 의보와 멸에서 동맹을 맺었다. 여름 5월, 정나라 제후가 단을 언에서 이겼다.(元年春, 王周正月. 三月, 公及邾儀父盟于滅. 夏五月鄭伯克段于鄢)” 隱公 원년

이렇다보니 시대가 흐를수록 『춘추』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메모 수준의 간략한 기록만으로는 역사적 교훈의 구축은 고사하고, 사건의 전모 파악 자체가 버거웠다. 『춘추』만 본다면 설령 聖人이 10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읽는다 해도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하리라는 푸념까지 나왔다. 명색이 경전인데, 게다가 공자가 편찬한 책인데 그 뜻을 밝혀 드러내지 못한다면, 유가들 보기에 이는 역사에 대해 중죄를 짓는 일과 다름없었다. 여기저기서 『춘추』 주해서가 출현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관련 기록에 23종의 주해서 이름이 보일 정도였다.

『공양전』, 서구 침탈에서 진화론 분리 '결정타'

이 가운데 ‘춘추삼전’이라 불리는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모두 『춘추』에는 공자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전제 아래 메모 수준의 문장에서 대의를 길어내고자 했다. 다만 『좌씨전』은 이를 史實을 복기하는 방식으로 수행했고, 나머지 둘은 이치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수행했다. 예컨대 위의 “元年春, 王周正月.”이란 구절에 대해서 『좌씨전』은 “원년 봄, 주나라 달력 1월이다. 『춘추』에 은공의 즉위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음은 그가 섭정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주해한 데 비해 『공양전』은 이렇게 주해했다.(『곡량전』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공양전』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원년이란 무엇인가? 군주가 재위하기 시작한 해이다. 봄이란 무엇인가? 한 해의 시작이다. 왕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주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만든 文王을 말한다. 왜 왕을 먼저 말한 후에 정월을 말했는가? 천자인 왕이 정한 달력의 정월이기 때문이다. 왜 천자인 왕의 정월이라고 말했는가? 온 천하는 천자를 중심으로 통일(大一統)돼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양전』과 『좌씨전』의 내용 차이가 주해 방식의 차원을 넘어 역사 해석의 차원에서 비롯됐음 시사해준다. 나아가 역사해석은 그저 과거를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매개로 미래를 구성하는 작업이기에, 이들의 차이는 미래기획의 차이와 무매개적으로 연동된다. 그렇다고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옛적 요임금과 순임금 같은 聖王의 치적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미래를 기획한 『좌씨전』이나, 변화된 시대상황에 맞춰 제도를 개혁하는 방식으로 미래를 기획한 『공양전』 모두 나름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대 이후 『좌씨전』이 주류를 점했지만 『공양전』과 『곡량전』도 경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역사의 현장으로 꾸준히 소환됐다. 특히 서구열강의 공세에 빈사상태에 빠졌던 근대기처럼, 시대가 개혁을 절실히 요청할 때엔 더욱 그러했다.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여겨 온 ‘서양 귀신(洋鬼)’들이 자신들보다 더 진보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즈음, 일군의 개혁적 지식인들은 서구문명을 중국 개혁의 방편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들은 서구문명이 부강해진 근인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진화론이 그들의 혈안에 띄었다. 적자생존의 논리가 인간사회에 원용된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접하고는 무릎을 쳤다. 그들은 중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 진화론에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작지 않은 문제를 하나 풀어야 했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로부터 진화론을 분리해내야 하는 과제였다.

당시 ‘전국구’급 명망가였던 康有爲, 梁啓超 등은 이 난제 해결의 단서를 『공양전』에서 찾아냈다. 그곳에는 ‘三世說’이라 불리는 진화론적 역사관, 그러니까 역사는 혼란기인 ‘거란세’에서 이를 구제해 초보적인 안정을 일군 ‘승평세’를 거쳐, 대동이 실현되는 ‘태평세’로 진화한다는 사관이 제시돼 있었다.

이는 혹독한 가뭄 끝에 맞이한 단비(及時雨)였다. 그들은 군주전제를 거란세에, 입헌군주제와 민주공화제를 각각 승평세와 태평세에 짝지음으로써 자신들의 변혁 청사진을 완성했고, 이로써 진화라는 가치를 제국주의적 야욕에서 건져냄과 동시에 오랜 문명국가인 중국의 자존심도 덤으로 챙길 수 있었다. 그리고 『공양전』은 이후 근대적 개혁의 밑거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논자들은 이를 ‘淸末 公羊學派’ 식으로 명명하며 범주화했다.

고전이 시대의 부름을 받으려면

그러나 강유위 등이 사상 최초로 『공양전』을 변혁의 현장으로 불러낸 당사자는 아니었다. ‘청말 공양학파’만 해도 직전 세대인 自珍, 魏源 같은 경세 학자와 관료들에 빚지고 있었다. 그들은 18세기 들어 사회적 병폐가 격심해지고 제국의 기틀이 본격적으로 흔들리자, 『공양전』의 변혁사상에 의거해 구폐를 일소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청대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安史의 난으로 폐허가 된 제국을 수습해야 했던 唐 중엽, 柳宗元 등 일군의 개혁적 사상가들은 『좌씨전』식 해석에 『공양전』식 해석을 결합시켜 만든 공리주의적 개혁론을 들고 나왔다. 시대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고 혁신을 기획한 시도에서는 『공양전』의 내음이 물씬 풍기곤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미래가 갓 현실이 됐을 때도 『공양전』은 녹록치 않은 위력을 발휘했다. 미증유의 제국체제를 펼쳐냈던 漢은 『공양전』을 정통으로 채택함으로써 새로운 체제를 현실에 착근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효과적으로 수행해냈다. 사실을 생생하게 복기하고자 한 『좌씨전』에 비해 해석의 여지를 넓게 잡은 『공양전』이 혁신의 논리를 구축하고 변혁의 동력을 뽑아내는 데에 훨씬 유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춘추』의 주해서 가운데 『공양전』만 시대의 부름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좌씨전』도 만만치 않았다. 『삼국지』의 關羽는 ‘좌씨전 매니아’였는데, 이는 ‘좌씨전 신드롬’이 분 魏晉시대의 산물이었다. 과거제가 정착된 당대 이후로는 『좌씨전』이 과거 수험용 논술교재로 각광받기도 했다. 당연한 언급이지만, 고전이 시대의 부름을 받는 까닭은 미래기획 한 가지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