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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베르 드 노장의 자서전』, 혼자 부르는 노래의 여운
『기베르 드 노장의 자서전』, 혼자 부르는 노래의 여운
  • 염정삼 서평위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 승인 2012.06.12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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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지금 눈을 감았다가 떠보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왔고,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것은 개인보다 공동체가 더 중요시되던 중세 유럽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중세 유럽인들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곤 했다.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공동생활을 했으며, 기사들 역시 무리를 지어 돌아다녔고, 농민은 공동 경작을 했다. 중세 유럽인들의 존재는 공동체 속에 있을 때에만 안전했다. 그러므로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하는 ‘파문’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한 마디로 ‘나’는 관계 속에 있는 존재였다. 이런 시대에 자신의 내면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가 있었다. 기베르 드 노장(Guibert de Nogent)이다. 그는 1053년 경 프랑스 북부 보베지방의 클레르몽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재산을 노리는 친척들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헌신하며 기베르를 종교적인 훈육 아래 키웠다. 한 때 방탕한 생활을 하던 기베르는 어머니의 인도로 수도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성 안셀무스의 학식에 감화를 받아서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1104년에는 프랑스 북부에 있는 노장의 수도원 원장이 되었으며, 1125년 사망했다.

어머니는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자신이 “나는 무엇보다 가장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아름답고, 순결하며, 정숙하고,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는 어머니를 내게 보내주신 점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자서전은 그가 수도원장이 된 이후에 집필됐다. 총 3권으로 이뤄진 그의 자서전은 다른 자서전과는 달리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제 1권은 자신의 성장과정과 종교적 심성을 드러내는 부분으로서 일반적인 의미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부분은 신 앞에 홀로 선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야말로 자신을 수도원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완전히 독립된 개인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제 2권은 수도원의 역사 및 자신의 수도원장 취임, 그리고 종교적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이 부분은 중세에 흔히 볼 수 있는 ‘수도원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기베르가 1권에서는 자신을 신 앞에 홀로 서있는 모습으로 그렸던 것과는 달리, 2권에서는 수도원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즉 수도원장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3권은 코뮌과 관련된 도시 폭동을 전달하고 있다. 12세기 초 프랑스 북부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코뮌을 조직해 영주의 수탈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켜 자유를 획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부분은 당시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 사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코뮌의 봉기와 진압의 과정을 기술하면서도 기베르는 그에 대해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눈에 도시와 상업의 발전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신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에는 종교적인 기적과 환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는 신이 주신 선량하고 경건한 영혼을 지키지 못하고 유혹과 타락에 굴복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한탄했다. 그는 “오늘날 사악함이 점점 가득해짐에 따라, 과거의 번영이 점차 쇠퇴하게 됐다”라고 한다든가, 여자들에 대해 “농담만 하고, 눈으로 윙크를 하며, 도발적으로 걷고, 몸에 딱 달라붙는 겉옷을 입는다”라고 비난하는 등, 당시 세태를 대단히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지상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신의 役事가 아니라, 오히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기베르에게 분명한 두 가지는, “내가 내 자신을 알려고 하는 만큼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고 해서 나에 대한 자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신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게을리 하지 않는 길, 그것은 혼자서 걸어야 하는 고독한 길이었다. 기베르가 살았던 시간과 공간은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거나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900년 뒤에도 과연 여전히 옳은 것, 혹은 현실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이 자서전을 통해 현대인에게 낯선 중세의 상황 속에 자신을 투사하면, 백지 상태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아를 찾아나가는지를 오히려 더 잘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염정삼
서평위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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