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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非世說) 브레송 사진展 '玉의 티'
(是非世說) 브레송 사진展 '玉의 티'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2.06.11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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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非世說

브레송 사진展 ‘玉의 티’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독일의 3대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게 있었다. 일명 딱정벌레車로 불리는 폭스바겐 비틀, 고속도로인 아우토반, 그리고 라이카(Leica) 카메라다.
히틀러의그런 자랑이 아니더라도,‘ 라이카’하면 1928년 라이카 카메라의 상업적 판매 이래 35mm 카메라의 정점에서 한 번도 그 자리를 내 준적이 없는 명기 중의 명기다.
영화에서도 라이카가 곧잘 칭송된다.

국내에선 지난 2000년에 개봉된「글루미 선데이」란 영화에서도 나온다. 여주인공 일로나를 사이에 두고 각축을 벌이는 세 명의 남자 중 한명인 한스가 일로나에게 뻐기기 위한 것인지, 라이카 카메라를 갖고 와 일로나에게 자랑하는 장면이 나온다.

“라이카에서 새로 만든 소형 카메라이지요. 독일의 세계적인 신상품이지요. 가장 놀라운 것은 이미지를 맞추는 거리 측정기예요. 나는 지금 일로나 양의 이미지 두 개를 봅니다. 이게 서로 겹쳐집니다. 그래서 단 하나의 이미지가 됐을 때, 일로나 양은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영화에서 한스가 들고 자랑하는 카메라는 스크루 마운트 타입의 IIIF로 보인다. 그러나 그 장면의 시대적 배경은 1935년의 부다페스트다. 1935년에 IIIF는 출시되지 않았다. 한스가 이미지 두 개 운운하는 것은
이중상 합치 랜지파인더를 언급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무렵의 모델인 IIIa가 아닌가 여겨진다. 라이카를 좋아하는 애호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논란거리가 된다.

라이카를 애호했고, 라이카를 통해 많은 걸작을 남긴 20세기 사진가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을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브레송은 라이카를 자신의 제 2의 눈으로 여겼으며 항상 라이카를 끼고 다녔다. “나의 라이카는 내 눈의 연장이다. 나는 그 사진기를 발견한 이후로 그것과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다.” 자서전격인 저서『결정적 순간』에서 브레송이 한 말이다.

마침 브레송의 사진들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생애 최후의 세계 순회 대회고전’이란 거창한 타이틀에 맞게, 그의 사진 한장 한장은 다시 봐도 생생한 찰나적 현실감과 함께 많은 감동을 준다.
그의 사진들 속에서 샤르트르와 체 게바라, 카뮈를 만난다. 그리고 비가 내린 직후 파리 ‘생 라자르 역’뒤 질퍽이는 거리를 만난다.

사진과 함께 시선을 끄는 건 전시장 입구에 전시해놓은 라이카 카메라들이다. 브레송이 라이카 애호가였던 만큼 사진과 함께 그런 의미를 부각시키려 한 의도인 것 같은데, 전시된 카메라는 십여 대의 카메라 중 딱 한 개를 빼고는 브레송과는‘무관’한 것들이다. 라이카 M3 딱 한 점 빼고 나머지 카메라는 대부분 브레송의 활동 연대와는 관련 없는 것들이라는 얘기다.

브레송의 명작으로 꼽히는「생 라자르 역 뒤에서」나「하이에나」등은 1930년대 초반 작품으로, 그 무렵이면 브레송이 스크루 타입 라이카 기종을 사용했을 터인데, 그 모델들은 한 점도 없었다. 흔한 것은 아니지만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기종이다. 대신 M8, M9 등 수백만 원 짜리 디지털 카메라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브레송과 디지털 카메라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얄팍한 상업적 속셈이 20세기 이 위대한 사진가의 전시회에‘玉의 티’가 될까 아쉽고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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