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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때 이른 질문 또는 철학의 운명
여전히 때 이른 질문 또는 철학의 운명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6.04 17: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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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편집자가 뽑은 문제작 ④ 도서출판 길 편

 

도서출판 길(대표 박우정)은 인문 출판 분야에 우뚝 선 자존심 센 출판사다. 1997년 6월에 출발했으니 연수로는 15년 정도다. 이 기간에 150여종의 학술서를 출판했다. 이들은 가장 공들여 제작했지만 저평가 된 책으로 김상봉 전남대 교수의 『서로 주체성의 이념』(2007)을, 기대와 달리 가장 호응이 좋았던 책에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2009)을 각각 꼽았다. 김상봉 교수의 前作 『나르시스의 꿈』(한길사, 2002)을 환대했던 독자들이라면 『서로 주체성의 이념』을 고대했을 지도 모르겠다. 앞의 책이 ‘논문 모음집’ 형태였기 때문에, 눈 밝은 독자들은 저자가 그의 철학적 근거와 사유 세계를 좀 더 심화된 단일 주제와 내용으로 펼쳐주길 기다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 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이란 책의 부제처럼, ‘연습’ 단계를 넘어서는 뭔가가 나와 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책은 5년의 시간이 흘러 구체화됐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머지않아 사람들이 이 땅의 철학자들에게 물어볼 때가 올 것이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철학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지금에서 보자면 이 물음은 아직 이른 물음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핵심은 의외로 간결하다. 그의 메시지는 ‘이 땅에서의 철학함’을 근본부터 바꾸자는 데 집중된다. 어떻게 철학함을 바꿀 수 있을까. 질문을 ‘우리’에게 맞추는 데서 시작한다. 저자는 이 끈질긴 ‘우리’라는 운명공동체의 씨줄과 날줄을 이렇게 다잡는다. “나는 나를 부르는 너에게 응답함으로써 처음 주체로서 부름 받았다. 내가 너에게 응답할 때 나와 너는 부름과 응답 속에서 우리가 된다.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를 부르고 대답 하면서 우리가 될 때 나와 너는 서로 주체성 속에서 주체로 생성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고립된 내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됨으로써만 주체인 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되지 못하는 나는 나도 되지 못한다. 그때 나는 주체가 될 수 없는 나, 사물이 될 수밖에 없는 나인 것이다.” 도서출판 길의 이승우 주간은 “저자의 다른 책들에 비해서 판매 부분에서는 좀 저조한 편이었다. 원인이 뭐냐고? 달리 무어라 덧붙일 것이 사실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사실 김 교수의 글은 흠잡을 데 없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첫 저작인 『호모 에티쿠스의 탄생』의 첫 독자로서 그 당시 느꼈던 전율은 ‘이 땅에서도 이런 식의 사유와 글쓰기가 가능한 철학자가 존재하는구나’였다. 비록 저평가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 책이 이 땅에서 우리식의 철학함의 단초를 마련해놓았다는 데 대해 의미를 두고 싶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것처럼, ‘이 땅에서 철학하는 것의 의미’를 묻는 이 근본 질문은 여전히 때 이른 것일 수 있다. 철학을 자유인을 위한 학문으로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질문은, 이 책의 운명과 함께 한국 철학의 수준을 잴 수 있는 하나의 눈금이 될 것이다. 도서출판 길이 기대와 달리 호응이 좋았던 책으로 꼽은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앞의 책과 달리 출판 자체에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이승우 주간은 “원래부터 고전 번역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터라 이미 출간된 고전이더라도 절판됐거나 번역상의 문제가 많다고 지적된 책에 대해서는 재출간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라고 말한다.

칼 폴라니의 이 책은 사실 민음사판(『거대한 변환』, 1997)으로 이미 출간돼 있었다. 그러나 절판 상태였고, 번역상의 문제도 심심찮게 지적됐다. 절판 상태라 출판사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저작권 계약을 추진하고 있었던 H출판사와 허심탄회하게 협의한 끝에, 번역자가 확정돼 있었던 도서출판 길이 출판할 수 있었다. 이승우 주간은 “출간 시기가 우연하게도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전세계적으로 명백히 드러나고 그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는 시점이어서 자연스레 언론매체로부터 주목 받았고, 예상치 않게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라고 설명한다.

2003년 제2의 창사 이후 현재까지 도서출판 길의 도서 가운데 유일하게 1만부 판매가 넘어선 책이기도 하다. 하이에크 식의 ‘시장경제 유토피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바탕으로 ‘인간을 위한 경제학’을 제기한 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대표 저서인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44년이었다. 책의 주된 주제가 되는 사상적 토대는 그가 23세가 되던 1909년에 발표한 논문 「우리 이념의 위기」에 그려져 있었다. 이 책의 매력은, 오늘날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딜레마를 이해하고, 나아가 넘어설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즉, 시장 자유주의가 국경을 해체하고 있는 지금, 각 나라 단위의 사회들과 지구 경제를 모두 자기조정 가능한 ‘단일 시장’을 통해 조직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해 이 책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폴라니의 이 비판은 左右 두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하이에크나 마르크스 모두 극복 대상이며, 그들이 보지 못한 ‘경제’ 현상을 실체로서의 사회 속에서 읽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급박한 현실일수록 古典에서도 지혜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환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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