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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책의 굴곡진 궤적 … 무엇이 古典을 만드는가
모난 책의 굴곡진 궤적 … 무엇이 古典을 만드는가
  • 김월회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
  • 승인 2012.06.04 1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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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❻ 고전을 둘러싼 논쟁 ‘책의 운명’(동양편)

『묵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모난 책이다. 대개의 경우 이런 평가는 주로 현실권력의 눈 밖에 나거나 주류담론과 어울리지 않았을 때 내려지곤 한다. 『묵자』 자체에 모가 나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시선에 모가 나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다. 『묵자』의 경우가 딱 여기에 해당된다. ‘싸우는 나라들(戰國)’의 시대에 산생된 텍스트임에도 반전사상이 펼쳐져 있고, 시대정신은 부국강병인데 구분 없는 사랑(兼愛)과 이익의 공유(交利)가 설파돼있다. 말만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다. 영토 확장과 중원 통일이 대세였던 시절에 묵자를 신봉한 이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고, 이를 국가보다 앞세웠다. 게다가 이들의 전투력은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침략용 전쟁은 단호하게 거부했지만, 공동체를 수호하기 위한 전투에는 중원 최고의 달인들이었다.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얄미운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줄곧 동네북처럼 정을 맞았다. 그런데 『묵자』에 담긴 주장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것이 위정자만을 불편케 하는 수준을 넘어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주장은 분명 기성권력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反戰이그러하고, ‘兼愛’나 ‘交利’도 그러하다. 국가장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허례허식과 허위의식, 각종 낭비에 대한 『묵자』의 날선 비판을 감안하게 되면 더욱 더 그러하다.

문제는 이러한 비판이 문명 자체에 대한 부정과 직결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묵자』의 주장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다보면 어느덧 ‘자연상태’를 그려놓게 되기 때문이다.

『묵자』의 苦戰그리고 화려한 부활

이러한 점에서『묵자』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무관하게 텍스트 자체에 이미 모가 나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권력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조차 『묵자』 공박에 앞장섰다. 다른 각도에서 현실권력에 맹공을 퍼부었던 맹자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묵자』는 짐승을 몰고 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책이라고 단언했다. 가족과 타인을 구분 못하고 사랑하는 게 바로 금수들인데 이를 ‘兼愛’라 부르며 조장했으니, 이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
했다. 국가의 이해관계보다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임금의 명령보다 공동체 장의 명령을 앞세웠으니, 이는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는 야만과 진배없다고 몰아붙였다.

‘反-문명’ 그러니까 문명의 병폐에 대한 비판이 ‘非-문명’ 곧 ‘자연상태’로의 회귀로 대체될 수 있음을 섬세하게 읽어냈음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묵자』의 학설은 인기가 대단했다. 다른 이도 아닌, 금수 운운하며 묵자 공박에 열을 올렸던 맹자조차 “楊朱와 묵자의 말이 천하에 가득 차서 세상의 언론은 양주에게 귀의하거나 묵자에게 귀의했다”고 증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싸우는 나라들’의 시대인 전국시대, 일선에서 전투를 치르거나 전쟁으로 인해 가장 먼저 일상이 해체되고 생명이 소멸되고 마는 하층민들의 지지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하루에도 백 번의 전투가 벌어졌던 시절, 『묵자』에 담겨 있던 ‘非-문명’적 요소가 그들에겐 ‘차라리’ 실제적이고도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당시 하층민들은 별다른 사회적 안전장치도 없이 전쟁에 거듭 징발돼 전투에 투입됐다.

통치자들이 내건 신분상승이란 약속을 믿고 전투에 자원한 평민이나 노예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운 좋게 전투에서 살아남아 신분상승의 꿈을 이룬다고 해도 계속되는 전쟁 탓에 다시 징발됐다. 전투를 치를 때마다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명이 죽어 나가는 전장에서 목숨을 건진다는 것은 천운에 가까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이라는 지향은, 하층민들에게는 ‘사상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자 생활’의 문제였다.

따라서 생존과 생활을 위한 물적·사회적 토대의 구축은 시급한 시대적 과제였다. 『묵자』의 저작권자인 墨翟은 이 문제를 ‘작지만 강한’ 공동체의 건설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그가 공동체를 세우고자 한 까닭은 잦은 전쟁과 일상화된 국가 폭력으로부터 하층민을 떼어낼 수 있는 삶의 기반과 사회적 힘을 지녀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한 겸애나 교리와 같은, 위정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온하기 그지없는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현실권력의 물리적 견제에 맞설 수 있는 근거지가 필요했다. 이에 묵적은 고도로 훈련되고 엄격하게 조직된 공동체를 만들었다.

묵적의 이러한 시도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그의 사후에도 묵자공동체는 성장을 계속했고, 그 대중적 영향력은 유가나 법가를 한참 상회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그렇게 번성했던 묵자공동체가 일순간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다. 『묵자』도 덩달아 묻히기 시작했다. 진시황이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중원을 통일했던 즈음의 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진시황의 중원 통일과정에서 진으로 옮겨간 묵자공동체가 큰 힘을 발휘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한다.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묵자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이 진시황에게 투항해 그의 통일 사업을 도왔고, 그들의 위력을 본 진시황이 통일을 완수하자마자 가장 먼저 그들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묵자』의 굴곡진 운명은 이렇게 추동됐다. 진 제국을 이어 받은 한 제국도 『묵자』를 철저하게 배척했다. 그 이후 거의 이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묵자』는 금단의 영역에 갇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깰 줄 몰랐던 사자’에 불과했던 중국은 서구 열강과 붙는 족족 깨졌다. 이에 도깨비 취급을 하던 서양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서양문명을 배우자는 운동도 전개됐다.

사회적 관계과 古典의 영속성

그 와중에 민주니 인권, 박애와 같은 이른바 근대 시민사회의 덕목이 소개됐다. 이때 지난 2천년 가까운 시절 동안 이단이란 이름 아래 무시됐던 『묵자』가 시대를 앞서 간 책으로 화려하게 부활됐다. 평등, 휴머니즘 같은 말이 들리는 순간 묵적의 겸애, 교리 같은 주장이 환기됐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도 잠깐, 중국 대륙엔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고 대만엔 장개석 정부가 들어서자 『묵자』는 다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기득권층에겐 ‘逆鱗’이 될 수밖에 없는 겸애나 교리, 반전 같은 주장을 담고 있는 『묵자』는 그 자체로 쪼아내야 하는 모였다. 이에 『묵자』는 다시 주변으로, 비주류로 내쳐진 채 ‘수준이 일천하고 문체가 조야하며 체례가 산만한’ 책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고전’하면 으레 갖게 되는 오해 가운데 하나는 고전의 영속성에 대한 신뢰이다. 그러나 『묵자』의 기구한 운명은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오해인가를 잘 말해 준다.‘한번 고전은 영원히 고전’과 같은 경우는 없다. 그렇다고 탄생의 순간부터 고전인 텍스트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반드시 고전을 쓰고야 말테다’라고 작정했고, 또 실제로 훌륭한 작품을 썼다고 해도 그 작품이 반드시 고전이 된다는 보장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묵자』의 굴곡진 궤적이 보여주듯 고전은 철저하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 선택되고 결정된다.

이는 『묵자』에 난 모가 유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묵자』를 거세게 몰아붙였던 ‘맹자’ 또한 『묵자』 못지않은 부침을 겪었다. ‘맹자’가 어떤 책인가. 四書의 일원으로서 경전 중의 경전으로 대접받던 책이었다. 그럼에도 굴곡진 운명을 겪었으니,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은 고전만이 아니었던 게다. 제 아무리 경전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김월회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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