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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 혹은 性 그의 매력이 발산되는 곳
聖 혹은 性 그의 매력이 발산되는 곳
  • 홍지석 미술평론가
  • 승인 2012.05.30 1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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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50주년’ 클림트, 그를 읽는 몇가지 시선

 

▲ 「희망 Ⅰ」, 캔버스에 유채, 181×67cm, 1903.
올해는 1862년에 태어난 화가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다. 클림트 탄생 150주년을 빌미로 지금 우리의 미감과 예술관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는 일이란 어쩌면 지금 나의 삶을 성찰하는 일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유명세에 비해 사실 클림트는 주류 미술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가는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인상파-후기인상파-입체파와 야수파, 표현주의로 이어지는 서양근대미술사의 흐름에서 이 작가가 살짝(또는 상당히)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사라는 거대서사의 관점에서 보면 클림트는 19세기말 ‘아르누보’라는 큰 흐름에 속하는 작은 운동 ‘비엔나 분리파’ 또는 유겐트스틸(Jugendstil)의 일원일 뿐이다. 따라서 대부분 거대서사와 사조 중심으로 진행되는 대학의 일반 서양미술사 강의에서 클림트를 비중 있게 다루는 일은 쉽지 않다. 확실히 우리는 미술사의 문맥에서 클림트보다는 마네와 세잔, 피카소나 마티스를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클림트의 이름은 마네, 피카소라는 이름만큼이나 친숙하다. 그는 꽤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타작가이며 실제로 서점에는 클림트를 다룬 책들이 세잔이나 피카소를 다룬 책들 못지않게 많다. 왜 그런가. 클림트 관련 서적을 펼쳐보면 쉽게 그 답을 내릴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클림트를 다룬 책들이 거의 대부분 그의 생애와 연애사를 다루는데 지면을 할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빈센트 반 고흐의 경우와 마찬가지 현상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고흐의 생애에 관한 서술은 대부분 거룩하고 엄숙하며 진지한데 반해 클림트의 생애에 관한 서술은 대개 자극적이고 감각적이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고…”, “그가 죽자 열네 명의 여성이 친자확인소송을 냈다” 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걸작 「키스」의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가에 관한 치밀한 분석들은 그 백미다. 그리고 이런 서술은 대부분 성녀와 요부 사이에서 방황하는 남성 주체의 실존(!)을 확인하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퇴폐적이며 관능적인 에로티시즘? 이렇게 본다면 클림트는 퇴폐적이고 관능적이며 에로틱한 세계에 관여하는 작가다. 이러한 효과는 반짝이는 금빛이 더해져 배가된다. 황금빛 화가 클림트가 펼쳐 보여주는 삶과 작품이 감각을 자극하고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텍스트의 저자들 간에는 입장차가 존재한다. 가장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저자는 클림트를 아동들에게 소개할 처지에 놓인 저자일 것이다.

 

『황금의 마법사 클림트』(다빈치기프트, 2005)의 저자는 클림트의 그림과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의 동시를 나란히 배치하는 방식으로(그리고 부모를 위한 어려운(!) 서술은 뒤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 경우도 있다. 가령 『클림트』(재원, 1998)의 저자인 이주헌은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을 용인하되 그것을 퇴폐적인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건강한 에로티시즘으로, 여성의 잠재력에 대한 온전한 재발견의 차원에서 볼 것을 주문한다. 그가 보기에 “에로티시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만으로 똘똘 뭉친 사회일수록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희숙은 『명화속의 삶과 욕망』(마로니에북스, 2007)에서 클림트의 그림을 “여성의 감성은 남성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가령 「희망 Ⅰ」은 남성우월주의의 입장에서 본 임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설명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희망 Ⅰ」은 가난한 임산부인 모델 미치가 생계를 지원하는 클림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화폭 앞에 서게 된 결과다. 반면 이 작품이 임신한 매춘부를 형상화하고 있음에 주목해 남성이 그어놓은 聖(母)과 俗(요부)의 이분법이 통용되지 않는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신성림, 『클림트, 황금빛 유혹』, 다빈치, 2002). 신성림은 「철학」에 등장하는 회색으로 표현된 노년에서 존재의 고통을 본다. “깊은 허공 속에 뒤엉켜 정처 없이 떠다니는 맹목적 육체, 이것이 인간이다.” 聖스러운 것과 이콘 종교화 그러니까 클림트의 그림에 대한 평은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고통과 쾌락 사이에서의 줄타기에 집중돼 있다. 누군가에게 이 그림은 균형을 포기하고 세속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으로 보일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 그것은 양자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예컨대 박홍규는 「키스」에서 육체적 관능이나 열정적 몽환이 아니라 너무나 성스러운 사랑의 정신적 결합을 보았고 그 순수한 신비와 위엄에 압도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노라고 토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찔한 황금빛은 세속적인 음란함과는 거리가 먼 정적인 어떤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그 정적인 것은 금박으로 모자이크한 이콘 종교화와 통하는 것이다. 聖스러운 면에 천착한 박홍규에게는 작가의 삶도 다르게 보인다. “최하층 금세공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태어나 그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전통적인 장인 노동자처럼 상징의 형식인 장식과 색채로 정적인 조화를 그린” 클림트로 말이다. 이 글은 지금까지의 서술 과정에서 필자를 찔러온 독특한 어떤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해도 될 것이다. 그것은 ‘성스러운’을 읽을 때 나를 찔러왔는데 이것이 나로 하여금 ‘聖스러운’것을 자꾸만 ‘性스러운’으로 것으로 읽게 만들었다. 이 양자가 같은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오늘 나는 처음으로 인식했다. 지금 나는 어쩌면 이러한 再認이야말로 클림트가 오늘 내게 준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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