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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원숭이, 그리고 진보의 수렁
나르시스, 원숭이, 그리고 진보의 수렁
  • 이향준 전남대 BK21 박사후연구원·철학
  • 승인 2012.05.3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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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와 동행할 때, 타잔은 치타와 동행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흑인=원숭이’라는 경멸적인 개념적 은유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기로 하자. 비슷한 것에 비슷한 것을 비춰보는 것, 그래서 그 속에서 동질성과 이질성의 정도에 따라 정서의 진폭을 경험하는 것은 유사 이래로 보편적인 인간의 행위 양태 가운데 하나다. 원숭이에 인간을 비춰보는 것은 그 단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혹성탈출(Planet of the apes)」(1968)이 지구의 미래상을 원숭이의 세계로 그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는 비교적 쉽다.

한편 우물 속에 비친 자기의 이미지에 매혹돼 결국 죽음에 이른 나르시스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거기에서 과장되고 왜곡된 거울의 이미지를 읽어낸다. 잘못은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생각한 나르시스에게 있는 것이라고 결론내리기도 쉽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정체는 흔히 자기애의 비극으로, 자기 동일성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적인 상황의 비극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제는 SF의 고전이 돼버린 「혹성탈출」의 주인공은 나르시스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처지에 놓여 있다. 거기에는 어떤 공통적인 무지가 있다. 나르시스는 첫째, 거울 이미지가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혹성탈출」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도착한 별이 자기가 원하던 목적지라는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둘째, 나르시스는 이 무지에 기반해서 거울 이미지를 타자로 착각하고 그것에 가까워지기 위해 움직인다. 「혹성탈출」은 원숭이 세계가 사실은 자기가 찾던 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원숭이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움직인다. 즉 나르시스가 수렴하려고 시도하는 반면에 「혹성탈출」은 발산하려고 시도한다.

셋째, 자신의 거울 이미지에 수렴하려는 나르시스의 시도는 결국 발산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나르시스가 보고 있을 때, 자신의 거울 이미지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뻗으면, 물의 표면에 손이 닿는 순간 거울 이미지는 발산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흐트러트리고 만다. 결국 나르시스는 자신의 거울 이미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갖고 있는 여행자와 같은 처지가 된다.

반면 「혹성탈출」은 거꾸로다. 주인공은 원숭이 세계로부터 탈출하려고 시도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알게 되는 것은 탈출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자각이다. 왜냐하면 해변가에 쓰러진 자유의 여신상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그가 탈출하려는 곳은 다름 아닌 그가 가고자 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발산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수렴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맞닥뜨린다.

이렇게 볼 때 나르시스가 불가능한 수렴에 대한 알레고리라면, 「혹성탈출」은 불가능한 발산에 대한 알레고리다. 나르시스의 신화는 원형적인 구호 즉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혹성탈출」의 신화적 내러티브는 이와는 다르게 ‘그대 수렁으로부터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리’라고 선언한다.

한쪽에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에 사로잡힌 인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일종의 감옥에 갇힌 채로 ‘다른 어느 곳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인간’이 있다. 그들을 거울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하는 우리 노력의 부질없음과 빠져나갈 수 없는 우리 운명의 무지막지함 앞에 무방비의 상태로 노출돼 있다는 비극적인 인식에 도달한다. 우리는 이 무지막지한 운명의 수렁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까. 우리는 이루고자 하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고전적인 권력과 민주주의의 길항관계 속에서 우리는 둘 가운데 어떤 상황에 더 가까운 것일까. 나르시스로서 우리는 권력과 민주주의의 행복한 수렴 지점을 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혹성탈출」의 주인공처럼 빠져나가야 할 곳으로서, 결코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목적지에 이미 도달한 것일까. 혹시 우리는 니체가 불길한 어조로 예언했던 그 심연 속에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은 아닐까 —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라고 불리는 일련의 사건이 알려지고 논쟁이 확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내게 든 생각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그것이 진보의 비극이라면 아마도 원숭이 행성에서 수렁에 빠진 나르시스의 탈출기와 같은 어떤 것이 진보의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부디 이 탈출기의 결말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혹성탈출」의 주인공과 같은 운명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이향준 전남대 BK21 박사후연구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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